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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전선, 정보전쟁] 냉전기 소련의 ‘영향력 정보전’
1950년 노르웨이 총리 에이나르 게르하르센(오른쪽)과 부인 베르나. 소련은 총리 부인 베르나를 미남계로 포섭, 노르웨이가 자국 영토 내 미군 기지와 핵무기 배치 금지 등의 정책을 추진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했다. 노르웨이 정부는 소련과 국경을 맞댄 순수한 지정학적 전략이라며 반박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지난달 13일 영국 방첩기관인 보안국(MI5)은 중국·러시아·이란이 정치권·언론·사이버 침투 등 바다이야기룰 영향력 정보전을 통해 영국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있다며 공개 경고했다. 3일 후인 같은 달 16일에는 MI5의 켄 매캘럼 국장이 직접 나서 중국의 ‘영향력 정보전(influence operation)’이 영국 안보를 “매일” 위협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신사의 나라’ 영국이 왜 이렇게 반응할까. 영향력 정보전이 상대국의 정치권·여론 등을 움직여 한 알라딘게임 국가의 정책과 사상을 의도한 방향으로 서서히 기울게 하는 무서운 정보전이기 때문이다.
영향력 정보전, 상대국 정치통해 정책 조종 그 싹은 미·소 냉전의 장에서 텄다.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가 그 원형을 보여주었다. 미국 중심의 자유 진영에 맞서 상대국의 정치권·언론·학계 내부에 친(親)소련 여론과 정책을 확산시키는데 사력을 다했다. 릴게임종류 특히 그중에서도 대통령·총리 등 국가 최고지도자에 대한 접근을 많이 시도했다. 최고지도자는 그 나라의 정책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최고지도자를 직접 움직일 수 없으면 그를 움직이는 측근을 움직였다.
1954년 KGB가 미남계 공작으로 노르웨이 총리 부인을 포섭한 것이 좋은 예다. 노르웨이는 소련과 국경을 맞댄 바다이야기모바일 유럽의 최북방 요충지이므로 소련은 노르웨이를 우호적으로 돌리기 위해 늘 노력했다. KGB도 그 일환으로 소련에 비교적 우호적인 노동당 출신 게르하르센 총리에 대한 접근을 시도했다. 우선 그 전 단계로 총리 부인인 베르나를 포섭해 접근통로를 확보하기로 했다.
기회는 의외로 쉽게 찾아왔다. 1954년 그녀가 노르웨이 청년단체를 이끌고 모스크 황금성사이트 바를 방문하자, KGB는 젊고 잘생긴 요원 벨야코프를 투입해 그녀를 포섭하도록 임무를 부여했다. 그녀의 모스크바 안내원으로 위장한 벨야코프는 KGB 안가를 자신의 집으로 속이고 베르나를 초대해 짧은 밀애를 나누었다. 그런데 베르나가 금세 사랑에 빠졌다. 1차 성공이다. 그녀는 세 자녀의 어머니로 남편 게르하르센 총리보다 15살 아래였다.
1955년 10월 베르나는 다시 모스크바를 찾았다. 게르하르센 총리의 소련방문 동행이었다. 남편 몰래 벨야코프와 재회했다. 그녀의 연정을 확인한 KGB는 확실하게 그녀를 포섭하기 위해 벨야코프를 아예 노르웨이 주재 소련 외교관으로 파견했다. 이때부터 KGB는 베르나를 얀(Yan) 또는 피오나(Fiona)라는 암호명으로 관리하면서 게르하르센 총리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끊임없이 시도했다.
대표적 예가 노르웨이 영토 내 미군기지와 핵무기 배치 금지, 소련 국경 근처 NATO 훈련 제한이었다. 노르웨이가 NATO의 핵심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친소·반미로 비칠 수 있는 정책들을 고수한 것은 KGB에 포섭된 베르나가 남편인 총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중평이다. 그러나 노르웨이 정부는 소련과 국경을 맞댄 노르웨이의 순수한 지정학적 전략이라며 반박하고 있다. 아직도 논란이 정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1970년 베르나가 병사하자 KGB 본부가 빈소를 설치해 주었다는 증언으로 봐서 베르나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KGB의 프랑스 대통령 접근도 집요하게 이루어졌다. 문화적 자존심이 강한 프랑스를 이용해 NATO 핵심인 미국과 프랑스 간 이간의 씨앗을 뿌려 놓기 위해서다. 첫 시도는 1959년 드골 대통령의 절친인 모리스 드진이 프랑스 대사로 모스크바에 부임했을 때다. KGB는 미인계로 그를 포섭해 드골 대통령에게 소련에 우호적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협박했다. 그러나 드진은 이 사실을 본국에 알리고 스스로 사임했다. 작전 실패였다.
KGB는 포기하지 않았다. 1981년 사회당의 미테랑이 집권하자 새롭게 접근했다. 이번에는 대통령보다 측근과 지식인 그룹에 접근해 미테랑을 움직이기로 했다. 사회당 원로 클로드 에스티에를 비롯 언론·지식인 등을 영향력 요원(agent of influence)으로 등록해 소련에 우호적 담론을 확산시키도록 배후 조종한 것 등이다. 언론·지식인처럼 그 사회의 신뢰 자산을 통한 메시지 전달은 신뢰성과 권위가 부여돼 국민과 정책결정권자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올 1월 4일 르몽드지는 이를 상세히 보도했다.
KGB 내부를 폭로한 미트로힌 문서 2권. “세계는 우리 뜻대로 가고 있었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사진 아마존닷컴 캡처]
냉전기 인도에 대한 영향력 침투는 가장 성공한 사례로 손꼽힌다. KGB 내부를 폭로한 미트로힌 문서(Mitrokhin Archive) 등을 통해 많이 밝혀졌다.
KGB의 인도 침투는 인도를 우군화해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인도는 미·소 어느 진영도 거부한 비동맹 운동(NAM)의 리더로 제3세계권을 이끌고 있었다. KGB는 인도 우군화를 위해 언론·정치권·지식인 사회를 전방위적으로 침투했다. 특히 10개 이상의 인도 주요언론사를 영향권에 두면서 3500건 이상의 친소·반미 기사를 내보냈다. 이를 통해 ‘친소는 자주, 친미는 종속’이라는 여론을 만들어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하는데 활용했다.
영국 MI5 “중국 영향력 정보전, 안보 위협”
소련을 방문한 인디라 간디(가운데) 인도 총리. 그녀의 양옆으로 브레즈네프 서기장(오른쪽), 그로미코 외무상이 서있다. [중앙포토]
집권당인 국민회의당(INC) 다수 의원과 장관들에게 선거자금 지원 등을 통해 영향력을 확보한 후 인도 정부의 친소 정책 지지를 이끌었다. 특히 인디라 간디 총리가 정치적 위기를 겪을 때마다 인도 공산당(CPI)에게 총리를 지지하도록 지시했다. 이 덕택에 KGB와 총리 관계는 일상이 될 정도로 친밀해졌다.
이처럼 KGB가 인도 사회 전 분야에 성공적으로 침투한 것은 세계정보사에서도 가장 뛰어난 영향력 정보전으로 평가된다. 오늘날 중국·이란이 모델로 삼을 정도다.
냉전 후반기 들어 KGB의 영향력 침투는 다소 거칠게 이루어졌다. 아프간 정보전이 그 예다. 1978년 아프간은 공산혁명 성공으로 타라키에 이어 아민이 집권했다. 그런데 아민 대통령이 소련에 비협조적으로 변했다. 수차례 경고와 수차례 독살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고민하던 소련은 결국 아민을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KGB에 스톰-333(Storm-333) 작전을 하달했다. 군 정보기관과 특수팀을 만들어 대통령을 직접 사살하는 작전이다.
1979년 12월 27일 오후 7시 작전 개시와 함께 아민 관저로 진입한 특수팀은 방마다 사격과 수류탄 공격을 퍼부었다. 불길 속에서 아민의 어린 아들이 사망했고 아민 본인도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아민은 소련이 자신을 구하러 온 것으로 알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특수팀은 현장에서 사살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아민 제거 후 소련은 카르말을 새 대통령으로 옹립했다. 아프간 공산당 내 친소파로 부총리 역임 후 체코에 머물다 자의반 타의반 귀국했다. 이후 소련은 카불주재 KGB 거점을 통해 아프간 정권 내 친소파 인사관리 등 국가운영을 배후에서 좌지우지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소련의 몰락을 재촉했다. 대통령을 제거하고 친소 정권을 세우자, 아프간 전역에서 무장세력이 봉기했고, 이 전쟁이 10년간 지속되면서 소련은 국력을 많이 소모했기 때문이다(중앙SUNDAY 2025년 8월 16일).
이처럼 KGB는 냉전기 다양한 얼굴로 영향력 정보전을 펼쳤다. 특히 국가 최고지도자에 직접 접근을 시도하고, 그것이 어려우면 측근을, 측근이 어려우면 언론과 지식인을 동원했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무력을 동원해 강제적으로 권력을 교체했다.
그러나 이 같은 전술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결실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소련 스스로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 정보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포섭한 측근과 지식인 등을 정밀하게 관리해 발각되더라도 간첩죄를 피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지령을 받는 정식 스파이가 아니라 자신의 직위와 전문성을 활용해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포장해 주었다. KGB의 영향력 정보전이 스파이 정보전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소련의 영향력 정보전이 뿌린 씨앗이 오늘날 사이버·SNS 발전과 맞물려 대중(大衆) 심리 정보전, 대중 인지 정보전으로 발전하는 등 더 세련되게 진화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도 그 모습이 힐끗힐끗 보인다.
물론 냉전기 미국도 소련 못지않게 영향력 정보전을 펼쳤다. 특히 특정 인물을 대통령에 당선시켜 직접 배후 조종한 사례가 많았다.(계속)
최성규 고려대 연구교수. 국가정보원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국제안보 분야에 종사했다. 퇴직 후 국내 최초로 비밀 정보활동의 법적 규범을 규명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기자 admin@gamemong.info
1950년 노르웨이 총리 에이나르 게르하르센(오른쪽)과 부인 베르나. 소련은 총리 부인 베르나를 미남계로 포섭, 노르웨이가 자국 영토 내 미군 기지와 핵무기 배치 금지 등의 정책을 추진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했다. 노르웨이 정부는 소련과 국경을 맞댄 순수한 지정학적 전략이라며 반박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지난달 13일 영국 방첩기관인 보안국(MI5)은 중국·러시아·이란이 정치권·언론·사이버 침투 등 바다이야기룰 영향력 정보전을 통해 영국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있다며 공개 경고했다. 3일 후인 같은 달 16일에는 MI5의 켄 매캘럼 국장이 직접 나서 중국의 ‘영향력 정보전(influence operation)’이 영국 안보를 “매일” 위협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신사의 나라’ 영국이 왜 이렇게 반응할까. 영향력 정보전이 상대국의 정치권·여론 등을 움직여 한 알라딘게임 국가의 정책과 사상을 의도한 방향으로 서서히 기울게 하는 무서운 정보전이기 때문이다.
영향력 정보전, 상대국 정치통해 정책 조종 그 싹은 미·소 냉전의 장에서 텄다.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가 그 원형을 보여주었다. 미국 중심의 자유 진영에 맞서 상대국의 정치권·언론·학계 내부에 친(親)소련 여론과 정책을 확산시키는데 사력을 다했다. 릴게임종류 특히 그중에서도 대통령·총리 등 국가 최고지도자에 대한 접근을 많이 시도했다. 최고지도자는 그 나라의 정책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최고지도자를 직접 움직일 수 없으면 그를 움직이는 측근을 움직였다.
1954년 KGB가 미남계 공작으로 노르웨이 총리 부인을 포섭한 것이 좋은 예다. 노르웨이는 소련과 국경을 맞댄 바다이야기모바일 유럽의 최북방 요충지이므로 소련은 노르웨이를 우호적으로 돌리기 위해 늘 노력했다. KGB도 그 일환으로 소련에 비교적 우호적인 노동당 출신 게르하르센 총리에 대한 접근을 시도했다. 우선 그 전 단계로 총리 부인인 베르나를 포섭해 접근통로를 확보하기로 했다.
기회는 의외로 쉽게 찾아왔다. 1954년 그녀가 노르웨이 청년단체를 이끌고 모스크 황금성사이트 바를 방문하자, KGB는 젊고 잘생긴 요원 벨야코프를 투입해 그녀를 포섭하도록 임무를 부여했다. 그녀의 모스크바 안내원으로 위장한 벨야코프는 KGB 안가를 자신의 집으로 속이고 베르나를 초대해 짧은 밀애를 나누었다. 그런데 베르나가 금세 사랑에 빠졌다. 1차 성공이다. 그녀는 세 자녀의 어머니로 남편 게르하르센 총리보다 15살 아래였다.
1955년 10월 베르나는 다시 모스크바를 찾았다. 게르하르센 총리의 소련방문 동행이었다. 남편 몰래 벨야코프와 재회했다. 그녀의 연정을 확인한 KGB는 확실하게 그녀를 포섭하기 위해 벨야코프를 아예 노르웨이 주재 소련 외교관으로 파견했다. 이때부터 KGB는 베르나를 얀(Yan) 또는 피오나(Fiona)라는 암호명으로 관리하면서 게르하르센 총리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끊임없이 시도했다.
대표적 예가 노르웨이 영토 내 미군기지와 핵무기 배치 금지, 소련 국경 근처 NATO 훈련 제한이었다. 노르웨이가 NATO의 핵심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친소·반미로 비칠 수 있는 정책들을 고수한 것은 KGB에 포섭된 베르나가 남편인 총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중평이다. 그러나 노르웨이 정부는 소련과 국경을 맞댄 노르웨이의 순수한 지정학적 전략이라며 반박하고 있다. 아직도 논란이 정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1970년 베르나가 병사하자 KGB 본부가 빈소를 설치해 주었다는 증언으로 봐서 베르나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KGB의 프랑스 대통령 접근도 집요하게 이루어졌다. 문화적 자존심이 강한 프랑스를 이용해 NATO 핵심인 미국과 프랑스 간 이간의 씨앗을 뿌려 놓기 위해서다. 첫 시도는 1959년 드골 대통령의 절친인 모리스 드진이 프랑스 대사로 모스크바에 부임했을 때다. KGB는 미인계로 그를 포섭해 드골 대통령에게 소련에 우호적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협박했다. 그러나 드진은 이 사실을 본국에 알리고 스스로 사임했다. 작전 실패였다.
KGB는 포기하지 않았다. 1981년 사회당의 미테랑이 집권하자 새롭게 접근했다. 이번에는 대통령보다 측근과 지식인 그룹에 접근해 미테랑을 움직이기로 했다. 사회당 원로 클로드 에스티에를 비롯 언론·지식인 등을 영향력 요원(agent of influence)으로 등록해 소련에 우호적 담론을 확산시키도록 배후 조종한 것 등이다. 언론·지식인처럼 그 사회의 신뢰 자산을 통한 메시지 전달은 신뢰성과 권위가 부여돼 국민과 정책결정권자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올 1월 4일 르몽드지는 이를 상세히 보도했다.
KGB 내부를 폭로한 미트로힌 문서 2권. “세계는 우리 뜻대로 가고 있었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사진 아마존닷컴 캡처]
냉전기 인도에 대한 영향력 침투는 가장 성공한 사례로 손꼽힌다. KGB 내부를 폭로한 미트로힌 문서(Mitrokhin Archive) 등을 통해 많이 밝혀졌다.
KGB의 인도 침투는 인도를 우군화해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인도는 미·소 어느 진영도 거부한 비동맹 운동(NAM)의 리더로 제3세계권을 이끌고 있었다. KGB는 인도 우군화를 위해 언론·정치권·지식인 사회를 전방위적으로 침투했다. 특히 10개 이상의 인도 주요언론사를 영향권에 두면서 3500건 이상의 친소·반미 기사를 내보냈다. 이를 통해 ‘친소는 자주, 친미는 종속’이라는 여론을 만들어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하는데 활용했다.
영국 MI5 “중국 영향력 정보전, 안보 위협”
소련을 방문한 인디라 간디(가운데) 인도 총리. 그녀의 양옆으로 브레즈네프 서기장(오른쪽), 그로미코 외무상이 서있다. [중앙포토]
집권당인 국민회의당(INC) 다수 의원과 장관들에게 선거자금 지원 등을 통해 영향력을 확보한 후 인도 정부의 친소 정책 지지를 이끌었다. 특히 인디라 간디 총리가 정치적 위기를 겪을 때마다 인도 공산당(CPI)에게 총리를 지지하도록 지시했다. 이 덕택에 KGB와 총리 관계는 일상이 될 정도로 친밀해졌다.
이처럼 KGB가 인도 사회 전 분야에 성공적으로 침투한 것은 세계정보사에서도 가장 뛰어난 영향력 정보전으로 평가된다. 오늘날 중국·이란이 모델로 삼을 정도다.
냉전 후반기 들어 KGB의 영향력 침투는 다소 거칠게 이루어졌다. 아프간 정보전이 그 예다. 1978년 아프간은 공산혁명 성공으로 타라키에 이어 아민이 집권했다. 그런데 아민 대통령이 소련에 비협조적으로 변했다. 수차례 경고와 수차례 독살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고민하던 소련은 결국 아민을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KGB에 스톰-333(Storm-333) 작전을 하달했다. 군 정보기관과 특수팀을 만들어 대통령을 직접 사살하는 작전이다.
1979년 12월 27일 오후 7시 작전 개시와 함께 아민 관저로 진입한 특수팀은 방마다 사격과 수류탄 공격을 퍼부었다. 불길 속에서 아민의 어린 아들이 사망했고 아민 본인도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아민은 소련이 자신을 구하러 온 것으로 알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특수팀은 현장에서 사살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아민 제거 후 소련은 카르말을 새 대통령으로 옹립했다. 아프간 공산당 내 친소파로 부총리 역임 후 체코에 머물다 자의반 타의반 귀국했다. 이후 소련은 카불주재 KGB 거점을 통해 아프간 정권 내 친소파 인사관리 등 국가운영을 배후에서 좌지우지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소련의 몰락을 재촉했다. 대통령을 제거하고 친소 정권을 세우자, 아프간 전역에서 무장세력이 봉기했고, 이 전쟁이 10년간 지속되면서 소련은 국력을 많이 소모했기 때문이다(중앙SUNDAY 2025년 8월 16일).
이처럼 KGB는 냉전기 다양한 얼굴로 영향력 정보전을 펼쳤다. 특히 국가 최고지도자에 직접 접근을 시도하고, 그것이 어려우면 측근을, 측근이 어려우면 언론과 지식인을 동원했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무력을 동원해 강제적으로 권력을 교체했다.
그러나 이 같은 전술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결실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소련 스스로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 정보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포섭한 측근과 지식인 등을 정밀하게 관리해 발각되더라도 간첩죄를 피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지령을 받는 정식 스파이가 아니라 자신의 직위와 전문성을 활용해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포장해 주었다. KGB의 영향력 정보전이 스파이 정보전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소련의 영향력 정보전이 뿌린 씨앗이 오늘날 사이버·SNS 발전과 맞물려 대중(大衆) 심리 정보전, 대중 인지 정보전으로 발전하는 등 더 세련되게 진화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도 그 모습이 힐끗힐끗 보인다.
물론 냉전기 미국도 소련 못지않게 영향력 정보전을 펼쳤다. 특히 특정 인물을 대통령에 당선시켜 직접 배후 조종한 사례가 많았다.(계속)
최성규 고려대 연구교수. 국가정보원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국제안보 분야에 종사했다. 퇴직 후 국내 최초로 비밀 정보활동의 법적 규범을 규명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기자 admin@gamemong.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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