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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주랑남 작성일25-11-10 02:37 조회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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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14일, 온라인 커뮤니티 ‘웃긴대학’에 1만 자 분량의 긴 글 한 편이 올라왔다. 제목은 ‘누나가 죽었다’. 글쓴이는 일주일 전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 누나를 떠나보낸 동생이었다. 〈시사IN〉이 글쓴이의 동의를 받아 그 이야기를 지면에 싣는다.


누나가 죽었다. 누나는 선천적인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이었다. 태어나 한 번도 본인의 사지를 마음껏 움직여본 적 없다. 우리 가족에게 누나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부모님 입장에선 특히 더 그랬을 것목돈재테크
이다. 결혼하고 분가한 나와 달리, 누나는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 수 없다. 하루 최소 밥 두 끼와 똥오줌. 그 모든 걸 책임지며 데리고 살던 자식이다. 그것도 48년을. 본인들 20대에 낳아 48년을.


아버지는 누나 두고 어디 못 간다며 48년 동안 혼자 여행을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나는KB오토시스 주식
기회를 보다 몇 년 전 누나까지 데리고 제주도를 한 번 간 적 있다. 평생 바다 구경도 못 해본 누나랑 여행을 가보고 싶었다. 장애가 심한 누나는 의자에 앉을 수 없어서 비행기 탑승이 불가능했다. 아버지는 누나를 데리고 다니려면 자가용이 꼭 필요하다며 인천에서 페리선에 차를 싣고 가는 여행으로 계획을 잡았다. 누나는 누워서 가고, 올 때도 누워서 왔다. 다모아릴게임
그때 아쉬웠던 점을 고쳐 제주도에 한 번 더 같이 가고 싶었는데, 우리가 다녀온 직후 페리선이 사라져서 못 갔다. 차라리 인천 근처 섬에라도 한 번 더 데려갈걸.


누나가 떠난 뒤 집에 남은 게 몇 가지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최근 몇 년 누나가 자주 먹던 연어회다. 목요일이면 꼬박꼬박 누나가치주투자
에게 연어회를 사줬다. 마침 아버지가 연어회를 사간 날, 누나는 못 먹겠다고 하고서 병원에 실려 갔다. 그렇게 먹지 못한 연어회가 집에 남았다. 누나가 누워서 숨쉬기 편하게 몸을 세워둘 만한 것을 의사가 추천하기에 챙겨둔 등받이도 집에 남았다. 보름 전 아버지가 사달라 해서 가득 장만해둔 기저귀 몇백 개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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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7남매의 맏이로서 어디서 약한 모습 한번 보인 적 없는 전형적인 리더 유형이다. 하지만 속이 생각보다 많이 여리다. 집에 있는 누나의 흔적을 그 어느 것도 보고 버틸 수 없었다. 전부 치워야 했다.


어머니가 누나를 대하는 방식은 조금 애매했다. 딸이니까 당연히 보살피면서도, 필요한 선 이상 무언가를 더 하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T(MBTI 분류상 사고형)’의 사랑이었다. 필요한 것만 베풀었다. 심지어 누나를 두고 혼자 여행도 몇 번을 갔다. 아버지가 누나를 챙길 수 있으니 자기는 없어도 된다는 생각이었다. 나와 비슷했다.

누나가 처음으로 울음을 그쳤던 날

이렇게 딸을 대함에 과한 무언가가 없었던 우리 어머니가 과했던 시점이 한 번 있다. 누나가 나이를 먹어 성인으로 넘어가던 때였다. 그 시점에 누나를 장애인 직업학교에 보내라는 공문이 왔다. 그게 시작이었다. ‘우리 딸도 학교에 갈 수 있는 건가?’ 어머니는 기대를 가지고 전국 모든 장애인 학교에 연락했다. 괜찮다고 하면 누나를 등에 업고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이때 장애인 시설은 대부분 산 중턱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왜 그런지 우리는 안다. 장애인 시설은 기피 시설이니까. 그 산을, 버스도 잘 안 다니는 그곳들을 어머니는 직접 누나를 업고서 다 다녔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어떤 장애인 학교도 사지에 입까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누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누나를 받아주기만 한다면 편도 몇 시간 거리일지라도, 어머니는 누나를 아침저녁으로 데리고 갈 생각이었던 걸 나는 안다. 굳이 필요 없다면 안 하지만, 필요하다면 어머니는 누나를 위해 무엇이든 했다. 그래서 난 어디서도 안 받아준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이때 자신이 면허가 없어서 누나를 업고 그 길을 다녔던 것을 후회했다. 결국 환갑이 넘은 나이에 면허를 땄다.


그리고 그즈음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두고 자영업을 시작하면서 아버지의 벌이가 확실하지 않게 됐다. 어머니는 도배를 시작하셨다. 어머니는 평생 안 해본 부업이 없었지만 그때부터 좀 더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아마 아버지가 아니어도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을 거다. 그 이야기를 하면 기분 나빠할 아버지를 아니까 별다른 소리도 없이 일을 다녔다. 어머니는 그렇게 가족을 보살폈다.


아버지는 달랐다. 무뚝뚝하지만 전형적인 ‘F(감정형)’의 사람이었다. 요령은 없었지만 정말 성심성의껏 누나를 보살폈다. 평생 어디 놀러 가지도 않고 누나 곁에서 지냈다. 누나가 먹고 싶다는 건 뭐든 사다 날랐고,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건 어떻게든 해줬다. 회사에 다니는 동안에는 누나와 못 붙어 있었지만, 회사를 그만둔 뒤부터는 끼니까지 직접 챙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일흔이 넘도록 토막잠을 자며 누나를 돌봤다. 누나는 항상 같은 자리에 누워 있었다.ⓒ하라아빠 제공



야밤에도 누나 옆에서 잠들고 자다가도 눈을 떠 누나를 보살피는 게 아버지의 생활이 됐다. 밤 10~11시에 잠들고, 한두 시간 뒤 일어나 한번 보고 다시 자고, 또 두세 시간 뒤 다시 한번 보는 식으로 하루 대여섯 시간의 잠을 쪼개어 자다 깨다 하는 삶을 20년 넘게 보냈다. 그렇게 평생을, 일흔 살이 훨씬 넘는 나이까지 누나를 돌봤다. 아버지는 자신이 먼저 죽으면 딸을 보살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제일 두려워했다는 걸 나는 안다.


난 동생이라 별것 없었다. 무뚝뚝해서 어머니 아버지에게도 안 하는 애정 표현을 누나에게 하기도 어려웠다. 아프다고 손잡고 있는 것도 그렇지 않나. 그냥 같이 있을 때면 누나 팔 하나 당겨 와 목베개를 하고 누워서 책을 봤다. 내가 친한 사람들에게 바라는 건 대화보다 그저 옆에 있는 것이었기에, 내가 해줄 수 있는 일도 그것이었다.


그런 누나에게 배운 게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대화다. 누나와 대화하는 건 쉽지 않다. 힘들게 힘들게 한 단어 내뱉는 게 전부다. 그걸로 누나의 뜻을 다 파악해야 했다. 정말 온갖 추리를 다 해야 답이 나온다. 논리적으로 맥락을 이해하고, 들은 단어를 유사한 모든 음절의 단어로 바꿔보고 생각하며 대화해야 한다.


쉽지 않지만, 같이 살 때는 내가 부모님보다 누나 말을 훨씬 잘 알아들었다. 지금 시점에 말을 거는 건 높은 확률로 먹고 싶은 것을 말하고 있다며 이해한 다음, 입 모양을 보면서 발음을 유추한다. ‘되애기’라고 말하는 건가 싶으면 돼지고기가 먹고 싶다는 거고, 최근 맛있게 먹은 돼지고기는 돼지불고기였다는 걸 떠올려 “돼지불고기?”라며 누나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눈치가 빨라졌다. 연애하고, 아이를 키우고, 사회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누나는 태어나고 몇 년 동안 매일 울었다고 한다. 나중에야 ‘애가 왜 이러지? 돌이 지났는데 왜 기어다니지도 않지?’ 의문이 들었고, 부모님은 누나를 병원에 데리고 가서야 중증 뇌성마비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태어났는데 몸은 움직이지 않고,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런 누나가 울음을 멈춘 날이 바로 내가 태어나고 집에 온 날이라고 한다. 동생이라며 나를 앞에 눕혀두자, 누나는 꼬물거리는 날 보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소설 〈위키드〉에서, 주인공의 어머니는 첫째 딸인 주인공이 초록색 피부로 태어난 걸 보고, 둘째 딸을 임신했을 때 우유 꽃을 계속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 집도 그리 다르지 않다. 뇌성마비 첫째를 낳은 집이 둘째 아이를 낳을 때 얼마나 두려움이 많았을까. 부모님은 엄청나게 겁났다고 한다. 그런 두려움 속에 낳은 아이는 건강했고, 매일같이 울던 첫째가 그 아이를 보며 울음을 멈췄다. 아이를 키워본 집은 알 거다. 쉬지 않고 우는 아이가 어떤 존재인지. 그런 아이를 몇 년간 겪던 집이 겨우 숨 쉴 수 있게 되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난 그만큼 우리 집에서 대단한 존재였다.


풀리지 않은 문제를 꼽자면 ‘누나가 뭐 때문에 그렇게 태어났을까’ 같은 것인데, 사실 어머니가 누나를 임신했을 때 연탄가스를 마신 적이 있다. 어머니는 그 때문이 아니냐며 아직도 안타까워한다. 사실 이 이야기는 모든 생각을 속으로만 삭이는 어머니가 언젠가 딱 한 번 꺼낸 것이다.


누나와 지내면서 무엇보다 가장 놀랐던 건 누나의 명석함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부르기에 갔더니 누나는 TV를 눈으로 가리켰다. “TV? 왜?”라고 물으니 누나가 웅얼거렸다. 평상시 말하던 것과 달랐다. “뭐지? 어? 지금 TV 자막 읽은 거야?”라고 물으니까 누나가 정말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날 보며 웃었다. TV만 보고 한글을 뗀 거였다. 그리고 그걸 자랑하는 거였다.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닌 이 사건이 내 평생 기억에 남았다. 나도 모르게 누나가 머리도 나쁠 거라고 생각했는데, 누나가 TV만 보고 글을 익힌 걸 보고서 생각이 달라졌다. 그냥 TV만 보고 한글을 떼는 게 쉬운가?


돌이켜보면 누나는 생각보다 머리가 좋았다. 아주 옛날에 봤던 영화 내용도 거의 전부 기억했다. 몇 년 전에 보다 만 TV 시리즈도 정확히 어디까지 봤는지 다 기억했다. 그 내용을 물어보면 정말 할 말이 많은지 열심히 얘기하는데, 사실 난 그중 10%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누나가 전부 기억한다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이 트래킹(시선 추적) 마우스를 사면 누나가 혼자 컴퓨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파는 곳이 생각보다 없어서 구하기 힘들었다. 몇 번 알아보다가 포기했다. 장애인 단체에 문의해볼까 생각해봤지만 그냥 말았다. 그게 조금 아쉽다. 누나가 직접 컴퓨터를 했으면 어땠을까.


누나는 머리도 못 가누고, 20㎏ 초반대로 덩치가 너무 작은 데다가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려서 휠체어가 있어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제주도에 갔을 때 어린이용 휠체어를 빌려서 누나를 겨우 태웠지만 너무 불편했다. 누나를 붙잡은 손을 놓으면 누나는 몇 분도 못 버티고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렇다고 휠체어에 잔뜩 묶어두기에는 몸이 약해서 어떻게 될지 몰랐다. 실제로 들어 올리는 힘에 누나의 다리가 부러진 적도 있다.


몸무게가 가볍다 보니 차라리 내가 누나를 안고 다니는 게 더 편했다. 그러다 작년 어느 날 회사에 가는 길에 우연히 장애인용 유아차를 발견했는데 누나에게 딱 맞아 보였다. 그걸 인터넷에서 찾으려다 결국 못 찾았다. 그나마 비슷한 상품의 가격은 300만원을 가볍게 넘겼다. 조금 저렴한 녀석들을 뒤져보며 고민하다 외출 자체를 안 하는데 이걸 사서 언제 쓰지 싶어서, 다음에 여행을 다시 가게 되면 그때 사야겠다며 인터넷 창을 그룹으로 묶어 모아뒀다. 그런데 결국 살 일이 없어졌다. 이제 쓸 데가 없으니 저 창을 닫아야 하는데 닫기가 싫다.

장애인 가족으로서 정말 듣기 싫은 말



누나의 영정사진은 누나 얼굴에 다른 사람의 몸을 합성해 만들어야 했다. ⓒ하라아빠 제공



장애인 가족으로서 정말 싫어하는 말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 장애인을 죽인 가족 뉴스에 “장애인 보살피느라 힘든 가족 생각해서 형을 감경해야 한다”라는 말. 치가 떨리게 싫은 말이다. 그렇게 해서는 장애인을 죽이는 가족만 늘어난다. 부모가 어린 자녀를 죽이고 자살하는 걸 ‘동반자살’이 아니라 ‘아동 살해’라고 표현해야 하는 것처럼, 그건 그저 ‘장애인 살해’일 뿐이다.


두 번째, “보살피던 장애인이 죽었으니 이제 고생 안 해도 되니까 마음 편히 살라”는 말. 장애인 가족을 보살피는 게 힘들긴 하지만, 그걸 고생이라고 생각하면 못한다. 이건 우리에게 그저 생활이다. 이걸 ‘고생’이라 부르며 “죽어서 잘됐다”는 식의 말은 치욕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고생이라 부르더라도 그가 살아 있는 편이 낫다.


세 번째, 장애인 당사자가 평생을 고생했다며 “그런 거 보면 신은 없다”라고 하는 말. 당사자 입장에서는 눈곱만치도 못한 헛소리다. 불편한 아이를 키우는 처지에 제일 필요한 게 바로 신이다. 누나는 천국에 먼저 간 것이고 나중에 다시 만날 것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우리 아버지는 그 즉시 무너진다. 신은 필요하고 있어야만 한다. 중증 장애인과 함께 사는 삶은 그냥 그런 삶이다. 같이 살 뿐이다. 인내할 부분이 분명 있지만, 그 가족에게 그런 삶은 매일 밥을 먹고 잠을 자듯 당연한 생활이다. 힘들어도 같이 있는 게 무엇보다 더 나은 삶이다. 누군가에게는 불쌍하게 보일 그 삶도, 누나에게는 그저 그런 삶이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우리 가족 모두 누나가 언제든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뇌성마비 환자 중에서도 손꼽힐 만큼 중증인 우리 누나는 항상 위태로웠다. 병원에서조차 이런 환자를 본 적이 없다고, 어떻게 보살펴야 할지 모르겠다며 거절했다. 대학병원에서도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 전례 없는 케이스였다.


누나는 항상 누워 있고 입도 마음대로 못 움직이니 음식 섭취하기가 쉽지 않았다. 몸이 서서히 약해지고 골다공증에 걸리는 바람에 뼈까지 약해졌다. 누나를 들어 올리다 다리가 걸리면서, 누나의 허벅지 뼈가 부러져 살을 뚫고 나온 적도 있었다. 그때 누나를 들어 올린 사람이 어머니인데, 어머니가 누나의 허벅지 뼈와 솟구치는 피를 손으로 막으면서 버텼다. 그다음부터 어머니는 누나를 들어 올리는 걸 매번 두려워했다. 어머니가 티를 최대한 안 냈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때부터 아버지가 누나를 더 많이 돌봤다. 우리는 그렇게 평생 누나의 죽음을 생각하며 살았다. 결국 그 순간이 찾아왔다.


사실 지난해에 아버지는 누나 이름으로 된 청약통장을 해지하려 했다. 청약통장을 사용하려면 본인이 직접 해야 할 게 많기 때문에, 누나 명의로 된 청약통장을 사실상 사용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시점이었다. 은행은 본인이 안 오면 통장을 해지할 수 없고, 본인이 와도 직접 사인하지 못하면 해지를 해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럴 거면 왜 가입시켜줬을까. 결국 부모가 대리인 자격을 얻어야 해지가 가능했는데, 변호사와 의사를 집으로 불러서 누나의 상태를 확인받고, 기타 등등 절차를 밟아야 부모가 대리인 자격을 가질 수 있었다. 은행의 변호사가 그 과정을 대신 해주겠다며 수수료로 몇백만 원을 불렀다. 그 돈은 청약통장에 있는 돈의 3분의 2쯤 됐다.


아버지는 그 돈을 주더라도 대리인 자격을 받고 통장을 해지하려 했지만, 나는 100만~200만원 돈을 남기려고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에 반대했다. 성격 급한 아버지는 못 쓸 통장을 내버려두느냐며 그 돈을 써서라도 대리인 자격을 얻어 통장을 없애겠다고 말했다. 길게 설득하기 어려워서 “어차피 누나가 죽으면 그 통장은 자동으로 해지될 테니 내버려두라”고 말했다. 말이 씨가 됐는지 1년도 안 돼서 누나가 죽었다. 통장은 아마 곧 해지될 것이다.


누나의 사망 원인이 된 독감은 아버지로부터 옮아온 것이었다. 아버지는 한 대학교에서 관리소장을 하셨는데,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독감에 걸렸다. 2024년 12월 회사에서 나이가 많다고 해고됐다. 사실 몇 년 전 아버지가 70세를 넘겼을 때 이미 한 번 해고되었는데 새로 뽑은 사람이 일을 잘 못했고, 나이 상관없이 아버지에게 일을 시키라는 윗사람의 호출에 불려가 몇 년을 더 근무했다. 그러다 다시 나이가 너무 많다고 해고됐다. 잘리기 직전 사람들과 만나다 걸린 독감이 누나에게 옮아갔다.


아버지가 한 달만 일찍 일을 그만뒀더라도, 아니면 예전에 그만뒀어도 독감을 옮아올 일은 없었을 텐데. 그랬다면 외출도 안 하던 누나가 독감에 걸릴 일도 없었을 텐데. 그렇지만 아무도 그 얘기를 입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누나의 빈자리가 눈에 들어오면 아버지는 그 사실을 다시 떠올릴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나의 영정사진 속 인물은 누나가 아니었다. 몸이 뒤틀려 있는 누나는 정면을 보며 앉는 게 불가능했다. 장례식장 직원이 그나마 정면으로 찍힌 누나의 사진을 가져다가 누나 얼굴을 다른 사람의 몸에 합성해 새로운 사진을 만들어줬다. 평생 본 적 없는 너무 그럴싸한 누나의 모습에 장례식장에서 어머니는 “내 딸 아닌 거 같아”라고 말했다. 염을 어떻게 했는지, 입관하며 마지막으로 누나를 봤을 때 뇌성마비 환자 특유의 일그러진 누나의 얼굴이 전부 펴져 있었다. 내 평생 처음 보는, 좌우가 맞는 누나의 얼굴이었다. 나 역시 어머니처럼 누나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래전부터 예상하던 순간이었다. 누나와 함께해온 모든 시간 동안, 가족 모두가 이런 순간이 언젠가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화장할 때, 묻을 때 우리 중 아무도 울지 않았다. 울기엔 우리 모두 너무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준비해왔다.


어머니는 누나의 모든 물건을 빨리 치워버리고 싶어 했다. 집에 오자마자 쓰레기봉투를 사서 누나의 물건을 전부 담아 버렸다. 쓸 수 있는 물건은 교회에 모두 기부했다. 난 몇 가지 챙기고 싶었지만 그 말을 차마 꺼낼 수 없었다. 그저 사망신고를 하기 전 누나의 주민등록초본을 하나 떼서 따로 챙겼다. 48년간 살았던 흔적이 겨우 종이 석 장에 남아 있었다.


이제 본가에 가면 누나의 물건은 아마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을 터이다. 우리 누나는 그렇게 평생을 집에 누워 있었고, 그런 누나를 만나본 사람도 병원 사람과 친척뿐이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 있었다는 걸 가족이 아닌 누군가 알았으면 싶다. 글을 잘 쓰고 싶었는데 쓰다 보니 누나가 계속 떠올라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 내려가다 급히 마무리 짓는다.

하라아빠 (온라인 커뮤니티 ‘웃긴대학’ 필명)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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