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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이야기게임동영상 ㅵ 온라인 황금성 ㅵ♬ 96.rgu985.top ☆[김상목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늦은 밤, 책상 앞. 평범한 주택가 2층, 창문 밖에선 이웃집 부부의 다툼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가끔은 어린아이가 찢어지게 울고, 엄마는 달래다가도 종종 역정을 내며 언성을 높인다. 이골이 나 대충 저러다 말겠지 하고 넘기지만, 간혹 그 수위가 평소보다 많이 세면 옆집 사정이 궁금해지곤 한다. 혹시 큰일이 나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걱정이 되면 슬며시 현관 밖으로 나가 귀를 기울이지만, 거기에서 끝이다. 실은 이웃에 누가 사는지 얼굴조차 모른다.
요즘엔 밤길 걷다 다툼을 목격하거나 염려되는 상황을 스쳐도 끼어들기 겁난다. 인터넷을 떠도는 온갖 출처 불명 경험담은 대개 괜히 '오지랖 은행 직무소개 ' 부리다 봉변당한 일화로 가득하다. 예전과 달리 상식이 통하지 않는 흉흉한 분위기에선 더 망설일 수밖에 없다. 그런 회피가 현명함으로 취급된다. 하지만 주변 누군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막을 수 있었을 비극을 듣게 되면 우리는 아전인수 격으로 혀를 차며 대체 주위에선 뭘 했냐 따지게 된다.
이웃에 대한 개입은 경계를 넘나드는 아슬아슬 보험료 한 줄타기다. 쓸데없는 참견은 자주 불필요한 구설과 분쟁으로 귀결된다. 한번 데이면 다시 끼어들기 겁난다. 그러나 가끔은 정말 단 한 사람의 작은 관심이 누군가를 구하기도 한다. 선택은 각자 몫이지만, 그 작은 가능성은 희미한 등대 불빛처럼 기적을 품는다. 차정윤 감독의 첫 장편 <만남의 집>은 바로 그런 순간을 극적으로 압축하는 데 오롯이 집중한 결과다. 은행적금이자율
보이지 않는 벽 아래 숨은 이들
▲ <만남의 집> 스틸 서울대 대학원 이미지
ⓒ ㈜마노엔터테인먼트
교복을 입은 앳된 소녀가 거리를 걷는다. 차도를 건널 때는 보는 이가 불안해질 만큼 괜스레 위태롭다. 다행히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소녀는 목적지에 도착 전복자연산 한다. 그런데 학원도 집도 아니다. 변두리 골목에 흔히 보일 법한 낡은 여관 앞이다. 망설이던 소녀는 주변을 살피다 취객에 눈살을 찌푸리고 천천히 여관으로 들어선다.
단아하지만 차가운 표정의 성인 여성이 주택가 언덕길을 걷는다. 그녀 역시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는 듯하다. 고단한 몸 얼른 휴식을 취하고 싶을 텐데도, 그녀 역시 뭔가 망설이는 눈치다. 드디어 도착한 집은 깨끗해 보이지만 왠지 살풍경하다. 가족의 온기란 딱히 느껴지지 않는다.
별로 연결될 고리가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 천천히 그들에 관한 정보가 화면을 응시하는 관객에게 전달된다. 중간 간부 격인 '주임' 직급의 교도관 '태저'는 맡은 일에 충실하고 원칙에 엄격한 존재다. 주변 동료들은 그를 신뢰하고 따르기도, 확고한 태도 탓에 소원해 하기도 한다. 태저는 자신이 담당하는 수용자 사동을 순시하며 묵묵히 업무 스트레스를 삭힌다. 그렇게 십여 년을 봉직해 왔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담당하는 사동 수용자, '432번'의 모친이 사망한 소식을 듣는다. 하지만 432번은 분류 등급 문제로 특별 휴가 적용에서 탈락한다. 마음이 쓰인 후임 '혜림'은 자신들이 대신에 빈소를 다녀오자고 선배 태저를 열심히 꾄다. 그렇게 휴무일에 함께 찾아간 장례식장에서 그는 수용자의 딸 '준영'과 만난다.
빈소에서 스치듯 만난 데 불과하지만, 직무에만 충실하며 쳇바퀴 돌 듯 반복된 일상을 살던 태저는 수용자의 어린 딸에게 신경이 쓰인다. 둘의 삶은 가냘픈 실타래처럼 끊어지지 않고 계속 연결되며 서로에게 균열, 혹은 변화의 촉매가 된다. 그리고 준영의 엄마까지 셋은 기구한 교집합에 놓이기 시작한다. 작지만, 쐐기처럼 파고드는 균열은 그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불러올까?
금지된 공간
▲ <만남의 집> 스틸 이미지
ⓒ ㈜마노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중견 교도관 태저, 장기수 '미영(432번)', 미영의 딸 준영, 그리고 바깥 세상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교도소와 교도관, 수용자들 개별의 삶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사실주의 화풍처럼 세밀하게 묘사한다. 크레디트에 빼곡하게 수록된 정보를 통해 얼마나 제작진이 꼼꼼하게 현실을 고증하려 노력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대개 교도소 관련 영화가 극적 재미나 긴장을 위해 적당히 처리하는 지점을 <만남의 집>은 우회할 생각이 없다.
금단의 영역에서 일상을 보내는 이들의 삶은 과연 어떨까? 그곳 역시 사람 사는 곳이지만, 확실히 뭔가 다르긴 하다. 영화는 전반부 내내 관객이 마치 교도소 체험 탐방하듯 응시하게 만든다.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방법론으로, 그러나 그 못지않게 말초적 흥미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낯선 '동료 시민'들의 존재에 익숙해지도록 말이다.
<만남의 집> 속 교도소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할리우드 영화나 넷플릭스 드라마의 무대가 아니다. 지극히 한국적 현실에 속한, 군대처럼 인권과 통제 사이에서 각축하며 수많은 개별의 삶이 어우러지는 공간, 누구나 억울한 사정과 모순에 처하는 그곳에는 평범한 이들은 다가설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 수시로 생성되고 소멸한다. 영화는 그 작은 사회 내의 질서와 규율, 감시하는 이와 상대방 사이의 회색지대 묘사는 물론, 누구나 궁금해할 '일상물' 영역까지 폭넓게 소화한다. 밥은 어떻게 먹고 잠은 어떻게 자는지, 죄지은 이들은 어떻게 바깥 시민들이 누리는 자유를 제한받는지 생생하다.
카메라(너머 제작진)는 무심한 듯 사실적 풍경화를 담으면서도 공정해지려 노력한다. 스릴을 조성하려면 악당과 주인공을 나눠야 한다. 수용자가 주역이면 교도관은 악역을 맡아야 한다. 역으로도 그렇다. 그러나 교도소 안의 인간 군상은 그 특별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바깥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호의를 보이거나 맡은 바 임무에 충직한 이도 있고, 이기적 면모를 보이거나 타인을 적대하는 것으로 불만을 푸는 이도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부정적인 경우라도 절대 악으로 취급되진 않는다. 사소한 시비나 티격태격 갈등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기도, 입장 바꿔 생각하면 이해는 가능한 수준으로 조정된다.
그렇게 영화는 엄벌주의 vs. 교정주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시민들의 법 감정을 다독이며 현재 5만여 명이 훌쩍 넘어버린 교도소 수용자를 향한 이해와 재사회화 필요를 환기한다. 천편일률적인 흥미 위주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당면한 문제의 일단을 그리며 이해와 관심을 자연스럽게 이끈다. 교육 용도로 손색이 없다.
꽁꽁 잠긴 틈새로 스며드는 겨울의 햇살
▲ <만남의 집> 스틸 이미지
ⓒ ㈜마노엔터테인먼트
잊지 말자. <만남의 집>은 계몽영화가 아니다. 감독은 그저 담담하게 이 황무지 같은 척박한 공간에서 역설적으로 탄생하는 특별한 '만남'을 관객에게 뚜렷한 실체로 다가가게 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논리적 주장이 아니라 보는 이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온기로 말이다.
태저는 맡은 일에 충실하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을 것 같다. 그런 태저를 들쑤시는 건 질서와 관행에 의문을 품는 혜림의 몫이다. 천연덕스러운 게 얄미울 법도 한데, 태저는 늘 혜림의 청을 못 이긴 채 들어주는 편이다. 후배의 거듭된 도발은 지난 상처를 감추고자 무형의 갑옷을 껴입던 태저에겐 치명적 유혹과도 같다. 상급자 선배는 관행에 길들었지만, 새로운 세대는 질문하고 납득해야 동의할 수 있다. 그렇게 미래의 변화는 시작된다. 영화는 그 당연하지만, 시대 초월 갈등과 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과정을 밀고 나간다.
태저는 그렇게 준영을 만난다.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온 둘은 연령과 배경을 초월한 연민을 나눈다. 일단 시작된 변화의 수레바퀴는 되돌릴 수 없다. 삐걱대면서도 그 운동은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432번은 그 덕분에 원래의 이름을 되찾는다. 그 사변의 원동력은 '질문'과 '유도리'다. 빡빡한 관료주의 치하에선 금기시되는 것들, 하지만 법과 제도에 얽매인 사회가 구조적으로 갖는 '버그'를 치료할 힘의 원천이다. 연민과 상상력이 교차하자 수면 아래에서 조금씩 일어나는 가능한 변화들. 엄하게만 보이는 법에도 '온기'가 필요함을 웅변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의 영화다.
영화의 치명적 매력
▲ <만남의 집> 스틸 이미지
ⓒ ㈜마노엔터테인먼트
감옥이란 특별한 소재는 감독에게 손쉬운 유혹을 수십 수백 번 던졌을 게 분명하다. 현실을 반영하기보다 신파로 덕지덕지 덧칠해 억지 눈물을 흘리도록, 그러나 극장을 나서는 순간 언제 그랬던 듯 증발하는 방식 말이다. 그러나 감독은 악마의 묘약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마치 화면 속 주인공들이 자기 곁에서 살아 숨 쉬는 존재인 양 안절부절 그들의 인연을 빚어냈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가장 진득한 장면들은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 소리 없이 폭발한다. 애써 강한 척, 안 그런 척 표정을 드러내지 않을 때가 몇 곱절 더 슬프고 저릿하다. 천천히 감정선을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차근차근 끌어올린다. 그 흐름에 조응하다 보면 태저가 고백하듯 남이 울 때 따라 울게 되는 기이한 현상에 어느새 전염된 자신을 깨닫게 될 테다. 그 은근한 분출에 배우들이 겨울 햇살처럼 희미한 표정을 새길 때, 그 찰나는 관객 각자의 마음에 아로새겨지고 만다.
감독은 단편 < 나가요: ながよ >, <상주> , <비 내리는 날의 양자강>에서 꾸준히 소외에 처한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여성의 사연을 들려줬다. <만남의 집> 역시 감독의 관심사를 확장한 결실로 다가온다. 나무늘보 지켜보듯 처음엔 그저 밋밋하고 한없이 늘어져 보이지만, 우리 곁을 스치는 수많은 이웃을 (스마트폰과 에어팟에서 벗어나) 호기심과 연민으로 바라보면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체험으로 안내한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 군살 하나 없이 오직 관객에게 보여주고픈 진심만 남겼다. 그런 마음이 응결되어 물방울처럼 한 편의 영화가 탄생했다.
많은 감독이 첫 영화를 어렵게 완성한 나머지 궤도에서 막판에 이탈한다. 한 장면이라도 더 넣고픈 욕망은 강렬하다. 이야기를 멈출 수 없다.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감독은 오랜 세월 준비한 작품이 마침내 선보이는 경이의 순간에서 단호히 멈춘다. 그 '결정적 찰나'에 마치 툭 떨어지듯 진한 여운이 남는다. 떠오르는 대사 한마디, "네가 하는 모든 선택이 모여서 네가 돼" 누구보다 감독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 분명하다. 이제 그 '만남의 집'을 관객이 찾을 차례다.
<작품정보>
만남의 집Home behind bars2025|한국|드라마2025.10.15 개봉|122분|12세 관람가감독 차정윤출연 송지효, 도영서, 옥지영, 윤혜리, 박현영 외제공/제작 고집스튜디오배급 ㈜마노엔터테인먼트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늦은 밤, 책상 앞. 평범한 주택가 2층, 창문 밖에선 이웃집 부부의 다툼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가끔은 어린아이가 찢어지게 울고, 엄마는 달래다가도 종종 역정을 내며 언성을 높인다. 이골이 나 대충 저러다 말겠지 하고 넘기지만, 간혹 그 수위가 평소보다 많이 세면 옆집 사정이 궁금해지곤 한다. 혹시 큰일이 나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걱정이 되면 슬며시 현관 밖으로 나가 귀를 기울이지만, 거기에서 끝이다. 실은 이웃에 누가 사는지 얼굴조차 모른다.
요즘엔 밤길 걷다 다툼을 목격하거나 염려되는 상황을 스쳐도 끼어들기 겁난다. 인터넷을 떠도는 온갖 출처 불명 경험담은 대개 괜히 '오지랖 은행 직무소개 ' 부리다 봉변당한 일화로 가득하다. 예전과 달리 상식이 통하지 않는 흉흉한 분위기에선 더 망설일 수밖에 없다. 그런 회피가 현명함으로 취급된다. 하지만 주변 누군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막을 수 있었을 비극을 듣게 되면 우리는 아전인수 격으로 혀를 차며 대체 주위에선 뭘 했냐 따지게 된다.
이웃에 대한 개입은 경계를 넘나드는 아슬아슬 보험료 한 줄타기다. 쓸데없는 참견은 자주 불필요한 구설과 분쟁으로 귀결된다. 한번 데이면 다시 끼어들기 겁난다. 그러나 가끔은 정말 단 한 사람의 작은 관심이 누군가를 구하기도 한다. 선택은 각자 몫이지만, 그 작은 가능성은 희미한 등대 불빛처럼 기적을 품는다. 차정윤 감독의 첫 장편 <만남의 집>은 바로 그런 순간을 극적으로 압축하는 데 오롯이 집중한 결과다. 은행적금이자율
보이지 않는 벽 아래 숨은 이들
▲ <만남의 집> 스틸 서울대 대학원 이미지
ⓒ ㈜마노엔터테인먼트
교복을 입은 앳된 소녀가 거리를 걷는다. 차도를 건널 때는 보는 이가 불안해질 만큼 괜스레 위태롭다. 다행히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소녀는 목적지에 도착 전복자연산 한다. 그런데 학원도 집도 아니다. 변두리 골목에 흔히 보일 법한 낡은 여관 앞이다. 망설이던 소녀는 주변을 살피다 취객에 눈살을 찌푸리고 천천히 여관으로 들어선다.
단아하지만 차가운 표정의 성인 여성이 주택가 언덕길을 걷는다. 그녀 역시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는 듯하다. 고단한 몸 얼른 휴식을 취하고 싶을 텐데도, 그녀 역시 뭔가 망설이는 눈치다. 드디어 도착한 집은 깨끗해 보이지만 왠지 살풍경하다. 가족의 온기란 딱히 느껴지지 않는다.
별로 연결될 고리가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 천천히 그들에 관한 정보가 화면을 응시하는 관객에게 전달된다. 중간 간부 격인 '주임' 직급의 교도관 '태저'는 맡은 일에 충실하고 원칙에 엄격한 존재다. 주변 동료들은 그를 신뢰하고 따르기도, 확고한 태도 탓에 소원해 하기도 한다. 태저는 자신이 담당하는 수용자 사동을 순시하며 묵묵히 업무 스트레스를 삭힌다. 그렇게 십여 년을 봉직해 왔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담당하는 사동 수용자, '432번'의 모친이 사망한 소식을 듣는다. 하지만 432번은 분류 등급 문제로 특별 휴가 적용에서 탈락한다. 마음이 쓰인 후임 '혜림'은 자신들이 대신에 빈소를 다녀오자고 선배 태저를 열심히 꾄다. 그렇게 휴무일에 함께 찾아간 장례식장에서 그는 수용자의 딸 '준영'과 만난다.
빈소에서 스치듯 만난 데 불과하지만, 직무에만 충실하며 쳇바퀴 돌 듯 반복된 일상을 살던 태저는 수용자의 어린 딸에게 신경이 쓰인다. 둘의 삶은 가냘픈 실타래처럼 끊어지지 않고 계속 연결되며 서로에게 균열, 혹은 변화의 촉매가 된다. 그리고 준영의 엄마까지 셋은 기구한 교집합에 놓이기 시작한다. 작지만, 쐐기처럼 파고드는 균열은 그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불러올까?
금지된 공간
▲ <만남의 집> 스틸 이미지
ⓒ ㈜마노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중견 교도관 태저, 장기수 '미영(432번)', 미영의 딸 준영, 그리고 바깥 세상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교도소와 교도관, 수용자들 개별의 삶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사실주의 화풍처럼 세밀하게 묘사한다. 크레디트에 빼곡하게 수록된 정보를 통해 얼마나 제작진이 꼼꼼하게 현실을 고증하려 노력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대개 교도소 관련 영화가 극적 재미나 긴장을 위해 적당히 처리하는 지점을 <만남의 집>은 우회할 생각이 없다.
금단의 영역에서 일상을 보내는 이들의 삶은 과연 어떨까? 그곳 역시 사람 사는 곳이지만, 확실히 뭔가 다르긴 하다. 영화는 전반부 내내 관객이 마치 교도소 체험 탐방하듯 응시하게 만든다.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방법론으로, 그러나 그 못지않게 말초적 흥미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낯선 '동료 시민'들의 존재에 익숙해지도록 말이다.
<만남의 집> 속 교도소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할리우드 영화나 넷플릭스 드라마의 무대가 아니다. 지극히 한국적 현실에 속한, 군대처럼 인권과 통제 사이에서 각축하며 수많은 개별의 삶이 어우러지는 공간, 누구나 억울한 사정과 모순에 처하는 그곳에는 평범한 이들은 다가설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 수시로 생성되고 소멸한다. 영화는 그 작은 사회 내의 질서와 규율, 감시하는 이와 상대방 사이의 회색지대 묘사는 물론, 누구나 궁금해할 '일상물' 영역까지 폭넓게 소화한다. 밥은 어떻게 먹고 잠은 어떻게 자는지, 죄지은 이들은 어떻게 바깥 시민들이 누리는 자유를 제한받는지 생생하다.
카메라(너머 제작진)는 무심한 듯 사실적 풍경화를 담으면서도 공정해지려 노력한다. 스릴을 조성하려면 악당과 주인공을 나눠야 한다. 수용자가 주역이면 교도관은 악역을 맡아야 한다. 역으로도 그렇다. 그러나 교도소 안의 인간 군상은 그 특별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바깥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호의를 보이거나 맡은 바 임무에 충직한 이도 있고, 이기적 면모를 보이거나 타인을 적대하는 것으로 불만을 푸는 이도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부정적인 경우라도 절대 악으로 취급되진 않는다. 사소한 시비나 티격태격 갈등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기도, 입장 바꿔 생각하면 이해는 가능한 수준으로 조정된다.
그렇게 영화는 엄벌주의 vs. 교정주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시민들의 법 감정을 다독이며 현재 5만여 명이 훌쩍 넘어버린 교도소 수용자를 향한 이해와 재사회화 필요를 환기한다. 천편일률적인 흥미 위주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당면한 문제의 일단을 그리며 이해와 관심을 자연스럽게 이끈다. 교육 용도로 손색이 없다.
꽁꽁 잠긴 틈새로 스며드는 겨울의 햇살
▲ <만남의 집> 스틸 이미지
ⓒ ㈜마노엔터테인먼트
잊지 말자. <만남의 집>은 계몽영화가 아니다. 감독은 그저 담담하게 이 황무지 같은 척박한 공간에서 역설적으로 탄생하는 특별한 '만남'을 관객에게 뚜렷한 실체로 다가가게 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논리적 주장이 아니라 보는 이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온기로 말이다.
태저는 맡은 일에 충실하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을 것 같다. 그런 태저를 들쑤시는 건 질서와 관행에 의문을 품는 혜림의 몫이다. 천연덕스러운 게 얄미울 법도 한데, 태저는 늘 혜림의 청을 못 이긴 채 들어주는 편이다. 후배의 거듭된 도발은 지난 상처를 감추고자 무형의 갑옷을 껴입던 태저에겐 치명적 유혹과도 같다. 상급자 선배는 관행에 길들었지만, 새로운 세대는 질문하고 납득해야 동의할 수 있다. 그렇게 미래의 변화는 시작된다. 영화는 그 당연하지만, 시대 초월 갈등과 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과정을 밀고 나간다.
태저는 그렇게 준영을 만난다.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온 둘은 연령과 배경을 초월한 연민을 나눈다. 일단 시작된 변화의 수레바퀴는 되돌릴 수 없다. 삐걱대면서도 그 운동은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432번은 그 덕분에 원래의 이름을 되찾는다. 그 사변의 원동력은 '질문'과 '유도리'다. 빡빡한 관료주의 치하에선 금기시되는 것들, 하지만 법과 제도에 얽매인 사회가 구조적으로 갖는 '버그'를 치료할 힘의 원천이다. 연민과 상상력이 교차하자 수면 아래에서 조금씩 일어나는 가능한 변화들. 엄하게만 보이는 법에도 '온기'가 필요함을 웅변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의 영화다.
영화의 치명적 매력
▲ <만남의 집> 스틸 이미지
ⓒ ㈜마노엔터테인먼트
감옥이란 특별한 소재는 감독에게 손쉬운 유혹을 수십 수백 번 던졌을 게 분명하다. 현실을 반영하기보다 신파로 덕지덕지 덧칠해 억지 눈물을 흘리도록, 그러나 극장을 나서는 순간 언제 그랬던 듯 증발하는 방식 말이다. 그러나 감독은 악마의 묘약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마치 화면 속 주인공들이 자기 곁에서 살아 숨 쉬는 존재인 양 안절부절 그들의 인연을 빚어냈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가장 진득한 장면들은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 소리 없이 폭발한다. 애써 강한 척, 안 그런 척 표정을 드러내지 않을 때가 몇 곱절 더 슬프고 저릿하다. 천천히 감정선을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차근차근 끌어올린다. 그 흐름에 조응하다 보면 태저가 고백하듯 남이 울 때 따라 울게 되는 기이한 현상에 어느새 전염된 자신을 깨닫게 될 테다. 그 은근한 분출에 배우들이 겨울 햇살처럼 희미한 표정을 새길 때, 그 찰나는 관객 각자의 마음에 아로새겨지고 만다.
감독은 단편 < 나가요: ながよ >, <상주> , <비 내리는 날의 양자강>에서 꾸준히 소외에 처한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여성의 사연을 들려줬다. <만남의 집> 역시 감독의 관심사를 확장한 결실로 다가온다. 나무늘보 지켜보듯 처음엔 그저 밋밋하고 한없이 늘어져 보이지만, 우리 곁을 스치는 수많은 이웃을 (스마트폰과 에어팟에서 벗어나) 호기심과 연민으로 바라보면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체험으로 안내한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 군살 하나 없이 오직 관객에게 보여주고픈 진심만 남겼다. 그런 마음이 응결되어 물방울처럼 한 편의 영화가 탄생했다.
많은 감독이 첫 영화를 어렵게 완성한 나머지 궤도에서 막판에 이탈한다. 한 장면이라도 더 넣고픈 욕망은 강렬하다. 이야기를 멈출 수 없다.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감독은 오랜 세월 준비한 작품이 마침내 선보이는 경이의 순간에서 단호히 멈춘다. 그 '결정적 찰나'에 마치 툭 떨어지듯 진한 여운이 남는다. 떠오르는 대사 한마디, "네가 하는 모든 선택이 모여서 네가 돼" 누구보다 감독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 분명하다. 이제 그 '만남의 집'을 관객이 찾을 차례다.
<작품정보>
만남의 집Home behind bars2025|한국|드라마2025.10.15 개봉|122분|12세 관람가감독 차정윤출연 송지효, 도영서, 옥지영, 윤혜리, 박현영 외제공/제작 고집스튜디오배급 ㈜마노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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