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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 문화사에서 논란이 된 인물 이야기를 오늘의 관점에서 써 보겠다. 이런 뜻을 밝혔을 때, 문화예술인들이 가장 많이 거론한 인물이 고(故) 마광수(1951∼2017) 연세대 교수였다. 마 교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 음란물 유죄 선고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게 했다. 당초 문화사 사건의 시간순으로 연재하려던 계획을 접었다.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의 사랑 조작설, 소설가 정비석의 ‘자유부인’ 논란 등을 뒤로 미루기로 했다.
◇ “변태적인 글을 명문대 교수가…”= 1992년 10월 29일, 연세대 강의실에 형사들이 들어와 마광수 교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끌고 갔다. 변태적 사이다쿨접속방법 인 성행위를 노골적, 구체적으로 묘사한 소설 ‘즐거운 사라’를 썼다는 혐의에서였다.
민주화 바람이 불던 그 시대에 도대체 이런 일이 왜 벌어졌을까. 지금도 의문을 지닌 이들이 많다.
나무위키는 이 사건 기록에서 당시 국무총리가 마광수를 법적 처리하라고 검찰에 명령했다고 적시했다. 그러나 당시 서울지검 3차장이었던 심재륜 릴게임손오공 전 고검장은 “그 사법 처리는 오로지 나로부터 시작됐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간행물윤리위원회가 제재 결정을 내렸다는 신문 기사를 접한 후 ‘즐거운 사라’를 읽어봤다. 두 가지 점에서 불쾌감을 느꼈다고 한다. 예술이 이렇게 변태와 엽기로 치달아야 하는가.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 명문대 교수여도 되는가.
그의 지시를 받은 김진태 검사가 수 야마토통기계 사를 진행해 마 교수뿐만 아니라 책을 출간한 청하출판사 장석주 대표도 구속했다. 이후 3년간 법정 다툼 끝에 대법원은 유죄 평결을 내렸다. 문학 작품 외설성을 이유로 ‘영점하의 새끼들’(1969·박승훈 작), ‘반노’( 1973·염재만 작)의 작가들이 구속된 적 있으나, 법원 평결에서는 무죄를 받았다. 최종 유죄 판결을 받은 작가는 마 교수가 최초였다.
오리지널바다이야기 이 사건으로 마 교수는 연세대 교수직에서 해임됐다. 1998년 복직했으나, 2000년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연세대 학생들의 반발로 또 복직했으나 전공과목을 맡지 못하고 교양 강의자로 떠돌아야 했다. 그는 생전 “믿었던 후배와 동료 교수들로부터 왕따로 취급받는 고통이 컸다”고 되뇌었다. 우울증을 앓던 그는 2016년 정년 퇴임하고 1년 뒤 스 오리지널바다이야기 스로 세상을 등졌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사건을 지휘한 서울지검 심 차장이 정치권 외압에 맞서는 한편 인간미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이였다는 것이다. ‘불법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엄하게 단죄를 해도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은 최소화해야 한다’라는 게 그의 원칙이었다.
실무를 진행한 김 검사는 수천 권의 인문서를 독파한 것으로 알려진 다독가였다. 그는 검찰총장을 지내고 퇴임한 후 2016년 책을 펴냈다. 옛 시문(詩文)에 자신의 소회를 덧붙인 책의 제목은 ‘흘반난(吃飯難), 밥 먹기 어렵다’. 인생의 모든 이야기가 밥 먹는 것과 관련돼 있어서라고 했다. 그가 이런 책을 낸 다음 해에 마 교수는 밥 먹는 것을 아예 멈추고 다른 세상으로 갔다.
사법 처리가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시각이 다를 것이다. 다만 당시 1심 재판장이 마 교수 타계 후 고백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런 책이 나오는 것은 지금도 반대하지만, 처벌 대상이 되느냐는 다른 문제인 것 같다.”
윤리와 반윤리를 넘나든 시대의 초상인 고 마광수 연세대 교수. 소설 ‘즐거운 사라’ 저자로서 음란물제조 및 반포혐의로 구속된 마 교수가 1992년 12월 3일 첫 공판에 출정하는 모습(작은 사진). 연합뉴스
◇ 좌파 지배 지식생태계와 다양성= 알려진 것처럼 ‘즐거운 사라’는 프리섹스를 지향하는 미대생 나사라가 여러 파트너들과 섹스를 즐기며 쾌락을 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에로티시즘 문학 애호가로서 이 책을 출간 직후에 읽어보고 실망했다. 성애 묘사가 적나라하고 자세하지만 언어 미학이 떨어져서였다.
시인이기도 했던 마 교수는 논문에서조차 유려한 문장을 구사한 문필가였다. 에로티시즘을 표방한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 등에서도 그 미학이 매혹적이었다. 그런데 ‘즐거운 사라’는 너무 거칠고 자극적이어서 읽기 힘들었다. (심상대의 소설 ‘떨림’처럼 성애 장면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묘사해주길 바라는 것은 개인 취향일지 모르겠지만.)
그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됐다. 마 교수와 함께 고초를 겪었던 청하출판사 장 대표의 말.
“우리 사회는 밤과 낮이 같지 않은 위선적 사회였어요. 낮은 근엄한 도덕주의자가 지배하지만, 밤은 성적으로 타락한 사회였죠. 마 교수는 그런 이중성을 폭로하고, 성담론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고 싶었던 거예요. 그런 면에서 어쩌면 더 자극적으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작품을 썼던 것이죠.”
마 교수의 성애 소설은 신체적으로 유약한 서생(書生)의 정신적 배설 성격이 강했다. 그게 도덕주의자들의 위선과 부딪치면서 사회적 메시지를 품게 된 것이다.
장 대표는 ‘대추 한 알’이라는 시로 유명한 시인이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
소설책을 냈다가 말 그대로 벼락을 맞은 그는 당시 돈에 환장했다는 비난을 들었다. 한 출판사가 출간했다가 간행물윤리위 경고를 받고 폐간한 것을 다시 펴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그 소설뿐만 아니라 마 교수의 이론서들도 펴냈다. ‘마광수 문학론집’, ‘상징시학’, ‘심리주의 비평의 이해’ 등.
“당시 한국 사회는 좌파 이념이 휩쓸던 때였어요.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어서 편향된 사회가 되는 것을 우려했죠. 그런 점에서 마광수 같은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그러나 결과적으로 한국 지식 생태계에서 마광수는 사라졌고, 좌파 지식인들은 지배적 진영을 이뤘다. 그 핵심 인물들의 성 스캔들을 걸핏하면 목도하는 게 우리 현실이다.
◇ ‘여성의 성적 결정권’이라는 시각= 마 교수가 1989년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를 펴낸 후 성담론을 활발하게 펼치자, 여성주의 진영에서는 그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남성 시각에서 외모 지상주의를 찬양했다는 것이다. 그런 비판은 일리가 있다.
그런데 ‘즐거운 사라’에 대해선 이제 다른 관점이 가능할 듯싶다. 이른바 여성의 주체적 성적 결정권 문제이다.
고정 관념을 넘어서면 고전 소설 주인공으로 정절의 상징인 춘향이도 다르게 볼 수 있다. 남성 권력을 상징하는 변학도의 강압에 맞서 ‘내 성은 내가 알아서 한다’라는 주체적 결정권을 행사하는 여성이라는 시각이다. (이런 관점을 제시한 이가 연세대 국문학과에서 공부한 유광수 박사이다. 마광수 교수는 고루한 도덕주의 전통을 만들었다며 선배 이광수 작가를 비판함으로써 ‘광수가 광수를 싫어한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살아 있다면, 후학 유광수는 응원하지 않을까.)
‘즐거운 사라’의 여성 주인공은 윤리와 반윤리를 넘나들며 자신의 성적 욕구를 충족하는 데 이기적일만큼 솔직하다. 마 교수는 ‘저자의 말’에 이렇게 썼다. “우리나라 소설들이 보여줬던 상투적 여성상을 벗어나 보다 융통성 있고 적응력이 강한, 말하자면 긍정적인 여성상의 전형을 창조해 보려고 한 것이다.”
검찰과 법원이 ‘음란한 문서’라고 하는 바람에 성적인 묘사만 부각되고 말았지만, 이런 작의를 존중하는 연구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를 통해 특별히 부각돼야 할 것은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에 대한 존중이다.
만 28세에 교수임용시대를 앞서간 천재‘윤동주 연구’는 백미
음란서생 변태. 마광수 교수에게 이런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 성 관련 추문이 전혀 없었다. 점잖고 부드러운 사람이란 게 그의 지인들 평이다. 생전 시낭송 행사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유약해 보이는 외모에 어울리게 낮고 느린 어투였다.
‘시대를 앞서간 불우한 천재’. 그는 유복자로 태어나 홀어머니 슬하에서 이부(異父) 누나와 함께 자랐다. 전통적 가족관을 비판하는 글을 썼지만, 신산한 삶을 살아온 모친을 끔찍이 모셨다는 게 주변 사람 증언이다.
그는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해 4년 전액 장학금을 받았을 정도로 학업에 뛰어났다. 홍익대 국어교육학과 교수로 임용됐을 때 만 28세였다. 32세 때부터 모교에서 강의를 했다. 그는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시, 소설, 에세이 등을 왕성하게 발표했다. 그림에도 재능이 있어 수차례 전시회를 했다. ‘즐거운 사라’ 사건이 났을 때 동료 교수들이 등을 돌린 것은 교단의 권위주의와 함께 질투심 탓이었을 것이다.
학자로서 이론서적 집필은 적었으나, 그래도 8권을 남겼다. 그중 그의 박사 논문 ‘윤동주 연구’는 걸작이다. 1980년대에 이 논문을 접하고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있다. 윤동주에 대한 기존 연구를 모두 섭렵한 후 ‘상징’의 관점에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시대의 어둠에 대한 저항심이 내면으로 향하면서 ‘부끄러움의 미학’을 창조했다는 내용이다. 이후 윤동주 연구는 모두 마광수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이 학계 중론이다.
이 논문을 이번에 다시 읽다가 다음 대목에서 한참 머물렀다. ‘모든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은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윤리보다도 소중한 가치이다.’
장재선 기자 기자 admin@slotnara.info
◇ “변태적인 글을 명문대 교수가…”= 1992년 10월 29일, 연세대 강의실에 형사들이 들어와 마광수 교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끌고 갔다. 변태적 사이다쿨접속방법 인 성행위를 노골적, 구체적으로 묘사한 소설 ‘즐거운 사라’를 썼다는 혐의에서였다.
민주화 바람이 불던 그 시대에 도대체 이런 일이 왜 벌어졌을까. 지금도 의문을 지닌 이들이 많다.
나무위키는 이 사건 기록에서 당시 국무총리가 마광수를 법적 처리하라고 검찰에 명령했다고 적시했다. 그러나 당시 서울지검 3차장이었던 심재륜 릴게임손오공 전 고검장은 “그 사법 처리는 오로지 나로부터 시작됐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간행물윤리위원회가 제재 결정을 내렸다는 신문 기사를 접한 후 ‘즐거운 사라’를 읽어봤다. 두 가지 점에서 불쾌감을 느꼈다고 한다. 예술이 이렇게 변태와 엽기로 치달아야 하는가.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 명문대 교수여도 되는가.
그의 지시를 받은 김진태 검사가 수 야마토통기계 사를 진행해 마 교수뿐만 아니라 책을 출간한 청하출판사 장석주 대표도 구속했다. 이후 3년간 법정 다툼 끝에 대법원은 유죄 평결을 내렸다. 문학 작품 외설성을 이유로 ‘영점하의 새끼들’(1969·박승훈 작), ‘반노’( 1973·염재만 작)의 작가들이 구속된 적 있으나, 법원 평결에서는 무죄를 받았다. 최종 유죄 판결을 받은 작가는 마 교수가 최초였다.
오리지널바다이야기 이 사건으로 마 교수는 연세대 교수직에서 해임됐다. 1998년 복직했으나, 2000년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연세대 학생들의 반발로 또 복직했으나 전공과목을 맡지 못하고 교양 강의자로 떠돌아야 했다. 그는 생전 “믿었던 후배와 동료 교수들로부터 왕따로 취급받는 고통이 컸다”고 되뇌었다. 우울증을 앓던 그는 2016년 정년 퇴임하고 1년 뒤 스 오리지널바다이야기 스로 세상을 등졌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사건을 지휘한 서울지검 심 차장이 정치권 외압에 맞서는 한편 인간미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이였다는 것이다. ‘불법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엄하게 단죄를 해도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은 최소화해야 한다’라는 게 그의 원칙이었다.
실무를 진행한 김 검사는 수천 권의 인문서를 독파한 것으로 알려진 다독가였다. 그는 검찰총장을 지내고 퇴임한 후 2016년 책을 펴냈다. 옛 시문(詩文)에 자신의 소회를 덧붙인 책의 제목은 ‘흘반난(吃飯難), 밥 먹기 어렵다’. 인생의 모든 이야기가 밥 먹는 것과 관련돼 있어서라고 했다. 그가 이런 책을 낸 다음 해에 마 교수는 밥 먹는 것을 아예 멈추고 다른 세상으로 갔다.
사법 처리가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시각이 다를 것이다. 다만 당시 1심 재판장이 마 교수 타계 후 고백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런 책이 나오는 것은 지금도 반대하지만, 처벌 대상이 되느냐는 다른 문제인 것 같다.”
윤리와 반윤리를 넘나든 시대의 초상인 고 마광수 연세대 교수. 소설 ‘즐거운 사라’ 저자로서 음란물제조 및 반포혐의로 구속된 마 교수가 1992년 12월 3일 첫 공판에 출정하는 모습(작은 사진). 연합뉴스
◇ 좌파 지배 지식생태계와 다양성= 알려진 것처럼 ‘즐거운 사라’는 프리섹스를 지향하는 미대생 나사라가 여러 파트너들과 섹스를 즐기며 쾌락을 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에로티시즘 문학 애호가로서 이 책을 출간 직후에 읽어보고 실망했다. 성애 묘사가 적나라하고 자세하지만 언어 미학이 떨어져서였다.
시인이기도 했던 마 교수는 논문에서조차 유려한 문장을 구사한 문필가였다. 에로티시즘을 표방한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 등에서도 그 미학이 매혹적이었다. 그런데 ‘즐거운 사라’는 너무 거칠고 자극적이어서 읽기 힘들었다. (심상대의 소설 ‘떨림’처럼 성애 장면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묘사해주길 바라는 것은 개인 취향일지 모르겠지만.)
그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됐다. 마 교수와 함께 고초를 겪었던 청하출판사 장 대표의 말.
“우리 사회는 밤과 낮이 같지 않은 위선적 사회였어요. 낮은 근엄한 도덕주의자가 지배하지만, 밤은 성적으로 타락한 사회였죠. 마 교수는 그런 이중성을 폭로하고, 성담론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고 싶었던 거예요. 그런 면에서 어쩌면 더 자극적으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작품을 썼던 것이죠.”
마 교수의 성애 소설은 신체적으로 유약한 서생(書生)의 정신적 배설 성격이 강했다. 그게 도덕주의자들의 위선과 부딪치면서 사회적 메시지를 품게 된 것이다.
장 대표는 ‘대추 한 알’이라는 시로 유명한 시인이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
소설책을 냈다가 말 그대로 벼락을 맞은 그는 당시 돈에 환장했다는 비난을 들었다. 한 출판사가 출간했다가 간행물윤리위 경고를 받고 폐간한 것을 다시 펴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그 소설뿐만 아니라 마 교수의 이론서들도 펴냈다. ‘마광수 문학론집’, ‘상징시학’, ‘심리주의 비평의 이해’ 등.
“당시 한국 사회는 좌파 이념이 휩쓸던 때였어요.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어서 편향된 사회가 되는 것을 우려했죠. 그런 점에서 마광수 같은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그러나 결과적으로 한국 지식 생태계에서 마광수는 사라졌고, 좌파 지식인들은 지배적 진영을 이뤘다. 그 핵심 인물들의 성 스캔들을 걸핏하면 목도하는 게 우리 현실이다.
◇ ‘여성의 성적 결정권’이라는 시각= 마 교수가 1989년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를 펴낸 후 성담론을 활발하게 펼치자, 여성주의 진영에서는 그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남성 시각에서 외모 지상주의를 찬양했다는 것이다. 그런 비판은 일리가 있다.
그런데 ‘즐거운 사라’에 대해선 이제 다른 관점이 가능할 듯싶다. 이른바 여성의 주체적 성적 결정권 문제이다.
고정 관념을 넘어서면 고전 소설 주인공으로 정절의 상징인 춘향이도 다르게 볼 수 있다. 남성 권력을 상징하는 변학도의 강압에 맞서 ‘내 성은 내가 알아서 한다’라는 주체적 결정권을 행사하는 여성이라는 시각이다. (이런 관점을 제시한 이가 연세대 국문학과에서 공부한 유광수 박사이다. 마광수 교수는 고루한 도덕주의 전통을 만들었다며 선배 이광수 작가를 비판함으로써 ‘광수가 광수를 싫어한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살아 있다면, 후학 유광수는 응원하지 않을까.)
‘즐거운 사라’의 여성 주인공은 윤리와 반윤리를 넘나들며 자신의 성적 욕구를 충족하는 데 이기적일만큼 솔직하다. 마 교수는 ‘저자의 말’에 이렇게 썼다. “우리나라 소설들이 보여줬던 상투적 여성상을 벗어나 보다 융통성 있고 적응력이 강한, 말하자면 긍정적인 여성상의 전형을 창조해 보려고 한 것이다.”
검찰과 법원이 ‘음란한 문서’라고 하는 바람에 성적인 묘사만 부각되고 말았지만, 이런 작의를 존중하는 연구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를 통해 특별히 부각돼야 할 것은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에 대한 존중이다.
만 28세에 교수임용시대를 앞서간 천재‘윤동주 연구’는 백미
음란서생 변태. 마광수 교수에게 이런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 성 관련 추문이 전혀 없었다. 점잖고 부드러운 사람이란 게 그의 지인들 평이다. 생전 시낭송 행사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유약해 보이는 외모에 어울리게 낮고 느린 어투였다.
‘시대를 앞서간 불우한 천재’. 그는 유복자로 태어나 홀어머니 슬하에서 이부(異父) 누나와 함께 자랐다. 전통적 가족관을 비판하는 글을 썼지만, 신산한 삶을 살아온 모친을 끔찍이 모셨다는 게 주변 사람 증언이다.
그는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해 4년 전액 장학금을 받았을 정도로 학업에 뛰어났다. 홍익대 국어교육학과 교수로 임용됐을 때 만 28세였다. 32세 때부터 모교에서 강의를 했다. 그는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시, 소설, 에세이 등을 왕성하게 발표했다. 그림에도 재능이 있어 수차례 전시회를 했다. ‘즐거운 사라’ 사건이 났을 때 동료 교수들이 등을 돌린 것은 교단의 권위주의와 함께 질투심 탓이었을 것이다.
학자로서 이론서적 집필은 적었으나, 그래도 8권을 남겼다. 그중 그의 박사 논문 ‘윤동주 연구’는 걸작이다. 1980년대에 이 논문을 접하고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있다. 윤동주에 대한 기존 연구를 모두 섭렵한 후 ‘상징’의 관점에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시대의 어둠에 대한 저항심이 내면으로 향하면서 ‘부끄러움의 미학’을 창조했다는 내용이다. 이후 윤동주 연구는 모두 마광수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이 학계 중론이다.
이 논문을 이번에 다시 읽다가 다음 대목에서 한참 머물렀다. ‘모든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은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윤리보다도 소중한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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