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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 애호가라면 오랜 감상의 시간 속에서 누구나 한 번쯤 넘기 어려운 장벽과 마주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바흐와 모차르트와 베토벤과 브람스를 거쳐 어느 지점에선가 만나는 작곡가들 때문이다. 바로 말러와 쇼스타코비치와 브루크너다. 그중에서도 최종적인 고지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작곡가가 바로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1896)다.
브루크너는 9개의 교향곡과 여러 종교 음악을 남기며 19세기 후기 낭만주의의 거대한 봉우리를 세웠지만, 클래식 음악 감상에서는 가까이하기 힘든 대표적인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수많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노력에도 불구 하고 그의 음악은 여전히 ‘어렵고 지루한 음악’ 혹은 '고수들의 전유물' 같은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격정적인 철학과 광대한 스케일의 음악으로 유명한 말러조차도 이제는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브루크너는 여전히 '접근 불가' 영역에 머물러 있다. 브루크너 음반을 산 기억은 있는데 들은 기억은 없더라도 민망해할 필요 없다. 대부분이 그렇다. 필자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음악사적 비중에도 불구하고 브루크너가 대중적 인지도를 얻지 못하는 이런 현상은 가히 '브루크너 패러독스‘라 불릴만하다.
안톤 브루크너 /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교향곡으로 대표되는 브루크너 의 음악이 지루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음악 자체의 내재적 특성과 청취 환경에 따른 물리적 요인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그의 음악은 기다림의 미학을 강요한다. 말하자면 인내심을 요구하는 불친절한 요소들이 가득한 음악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먼저 만나는 어려움은 긴 연주 시간이다. 그의 교향곡은 한 악장이 보통 20~30분에 달한다. 전곡을 들으려면 8 0~100분의 긴 시간을 할애하여 그야말로 헌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에 느린 전개와 반복성이라는 두 번째 특성이 결합하여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브루크너의 음악은 빠르게 변화하는 드라마틱한 서사를 거부하고, 동기, 리듬, 화성 등의 작은 음악적 모티브를 반복하여 층층이 쌓아가며 에너지와 긴장을 높이는, 이른바 '증가 기법(Steigerung)'에 의존한 다.
증가 기법은 브루크너를 비롯한 후기 낭만주의 음악에서 자주 활용되는 작곡 기법으로서 브루크너 음악의 구조적 특징과 감정적 목표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통용된다. 문제는 긴 시간에 걸쳐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상승을 유도하며 최종적으로 거대한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러한 증가 기법이 성급함을 가진 감상자에게 지루함과 정체감을 유발한다는 점이다. 여기에 더하여 브루크너의 음악은 인간의 고뇌나 사랑 같은 일상적 감정보다는 신에 대한 찬미나 영원의 탐구 같은 초월적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목적의 비일상성은 듣는 사람에게 또 다른 정신적 몰입을 요구한다.
음악 자체의 구조적 특성과 아울러 브루크너 음악은 물리적인 청취 환경 측면에서도 높은 문턱을 갖고 있다. 그의 음악적 미학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직접 듣는 것이다. 그것이 어렵다면 정교한 해상도와 강력한 구동력으로 대편성 음악을 상당한 수준까지 재현하여 음장감을 만들어낼 수 있는 하이엔드 오디오가 대안이 될 수 있다.
사진출처. pixabay
그의 주요 작품 목록을 차지하는 9개의 교향곡은 하나같이 극단적인 다이내믹 레인지를 갖고 있다. 트레몰로 같은 여린 소리(ppp)도 명확하게 들려주어야 하는 동시에 금관악기가 굉음처럼 폭발하는 순간(fff)에도 소리가 찢어지거나 뭉개지지 않고 밀도 높은 에너지를 유지해야 한다. 나아가 브루크너적 웅장함의 기반을 형성하는 저음역대 현악기를 비롯하여 튜바와 트롬본의 묵직한 울림에 대해서도 단순히 양감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각 악기의 질감과 윤곽을 명료하게 살려 전달해야 한다. 게다가 악기들의 공간적 배치와 원근감을 사실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사운드 스테이지의 구현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오디오만이 아니라 스피커의 반사 음향까지 커버할 수 있는 널찍한 공간도 필수적이다. 문제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에게 일반적인 청취 환경이라는 것이 대개는 천정 낮은 아파트에서 듣는 소형 오디오나 이어폰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음향 장치로는 당연히 브루크너의 음악을 제대로 듣기 어렵다. '소리의 대성당(Klang-Kathedrale)'이라는 별칭처럼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대편성의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물리적인 울림과 진동,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층층이 쌓아 올린 복잡한 구조를 느끼는 것이 감상의 핵심 포인트가 된다. 안타깝지만 이를 구현할 수 있는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장대한 스케일의 브루크너 음악은 그저 지루하거나 시끄러운 소음으로 전락하기 쉽다.
이러한 어려움들로 인해 브루크너 듣기는 클래식 음악 감상의 '마지막 봉우리'가 되었다. 그의 음악은 우리에게 현대 사회의 속도와 과시보다는 인내와 겸손을 요구하며 상당한 고행의 과정을 통과한 감상자에게만 모든 것을 쓸어낼 듯한 압도적 카타르시스와 영광의 순간을 선물한다. 물론 브루크너의 작품 중에는 교향곡 외에 소편성 모테트 작품들도 있지만 아무래도 브루크너 음악에 대한 출발점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다. 부담스럽더라도 교향곡을 통해 이 거인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만나볼 필요가 있다. 마음의 준비를 위해 우리가 왜 그의 음악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한 번 살펴보자.
브루크너의 음악은 구조적 완벽성과 종교적 초월성을 결합하여 19세기 후반 유럽 음악계에 독자적인 거대한 건축물을 세웠다. 하지만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음악학자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은 저서 <음악에서의 위대성>에서 브루크너를 “동시대 사람들이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위대한 작곡가”의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하였다. 아인슈타인은 브루크너가 살았던 19세기 후반 빈에서 그의 음악이 환영받지 못했으며, 오히려 에두아르트 한슬릭(Eduard Hanslick)과 같은 영향력 있는 비평가들로부터 혹독한 비난과 조롱을 받았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당시 빈 음악계의 두 진영(보수적인 브람스 진영 vs. 진보적인 바그너 진영) 사이에 벌어진 대립의 구도 속에서 브루크너가 바그너를 열렬히 추종했기 때문에, 그가 브람스 지지자들의 정치적 공격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알프레드 아인슈타인 / 사진. © Georg Fayer, 출처. 위키피디아
당시의 청중과 비평가들은 브루크너의 '새롭고 독창적인 형식'과 '긴 호흡의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브루크너의 음악이 너무 길고, 반복적이며, 혼란스러운 것이라고 치부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진정한 위대성이란 '동시대의 유행과 논쟁'을 넘어선다고 주장하며, 브루크너의 음악이 후대에 와서야 비로소 그 초월적인 구조와 영적인 깊이를 인정받기 시작했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브루크너가 베토벤의 교향곡 정신을 이어받아 오르간적인 웅장함과 깊은 신앙심을 통해 독자적인 '건축적' 음악 세계를 구축했음을 높이 평가하였다. 아인슈타인은 브루크너에 대한 평가의 변화가 "(당대의 인정에 의한) 역사적 위대성"이 반드시 "(후대의 가치 평가에 의한) 예술적 위대성"과 일치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사례라고 말한다. 브루크너는 당대에는 실패했으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 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잠시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1990년 무렵 처음으로 오이겐 요훔의 브루크너 전집을 산 후 딱 한 번 듣고 몇 년간 씨디 랙에서 한 번도 꺼내지 않았었다. 의무감에 사로잡혀 그의 교향곡을 한 번씩 듣는 데도 상당한 고통과 고뇌의 시간이 필요했다. 도대체 이렇게 지루한 음악은 왜 만든 것이고 누가 듣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듣는 내내 가시지 않았다. 그러다가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의 책을 읽고 깊이 반성하며 다시 그의 음반을 꺼내 들었다. 그것이 브루크너와의 진정한 만남의 시작이었다.
브루크너와 동시대의 지휘자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ow)는 브루크너를 가리켜 '절반은 천재, 절반은 바보(half genius, half simpleton)라 평한 바 있다. 이는 그의 뛰어난 음악적 능력과 이에 대조되는 소박한 사회적 성품 사이의 간극을 지적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역설적으로 사회관계에 의지하지 않은 순수한 자아 특성이 그의 음악을 더욱 위대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음악을 애써 찾아 듣는 애호가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비로소 브루크너는 뒤늦게나마 제 몫을 찾아가고 있다.
지휘자 케네스 우즈(Kenneth Woods)는 브루크너 음악이 개인적인 드라마가 아닌 우주의 질서와 신의 영광을 담고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나르시시즘으로부터 감정을 해방”한다고 표현한 바 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오르간 연주자로서의 경험과 독실한 신앙심이 낳은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음악학자 데릭 쿡(Deryck Cooke)은 브루크너 교향곡이 "베토벤과 바그너에게 일반적인 빚을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형식적 과정의 절대적 독창성“을 갖고 있다고 평했다.
이는 그의 음악이 단순한 후기 낭만주의가 아니라, 그 자체로 고유한 하나의 장르를 형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브루크너에게 비판적이었던 브람스 진영의 비평가 막스 칼베크(Max Kalbeck)조차도 그의 음악을 "세속적인 논리, 예술, 상식이라는 불경한 첨가물 없이, 위나 아래로부터 받은 순수한 계시의 음악"이라 묘사했다. 브루크너에게 음악은 지적 유희가 아니라, 신과의 소통이자 영원성을 탐구하는 수단이었으며, 이는 교향곡에서 종교음악의 걸작 <테 데움 Te Deum>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 전반에 일관되게 흐르는 정서이다.
브루크너 교향곡의 위대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건축적' 구조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의 음악은 블록과 같은 모듈러 형태의 구조를 갖고 있다. 그의 교향곡은 베토벤처럼 주제를 유기적으로 발전시키기보다는, 거대한 음악적 블록이나 악기군의 색채 대비를 통해 독립된 구조를 형성한다. 그래서 마치 오르간의 레지스터를 바꾸듯, 금관이나 현악기 같은 특정 악기군이 교대로 등장하며 장대한 벽돌을 쌓아 올리는 느낌을 준다. 앞서 증가 기법에서도 간략히 이야기한 것처럼 브루크너의 음악은 여린 현악기 피아니시모의 트레몰로에서 출발하여, 리듬과 화성을 단계적으로 층층이 쌓아 올린다. 이러한 '고조(Steigerung)' 과정은 인내를 요구하지만, 그 과정에서 거대한 파도가 서서히 밀려오듯 막대한 에너지를 축적해 간다. 그리하여 악장의 거의 끝부분에 위치한 클라이막스에 이르러서는 최고조의 긴장감 뒤에 금관악기가 폭발하는 영광스러운 포르티시모의 해방감을 선사한다.
사진출처. pixabay
오르가니스트였던 브루크너는 관현악을 마치 하나의 거대한 오르간처럼 다루었다. 특히 트롬본과 튜바는 그의 교향곡에서 단순한 악기를 넘어 종교적 권위와 숭고함을 상징한다. 이들이 들려주는 웅장한 화성은 브루크너 음악의 백미이자, 그가 추구한 신성한 울림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교향곡이 갖고 있는 순환 구조와 '귀환(Return)'의 미학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5번 교향곡을 비롯하여 4번, 8번 등 여러 작품의 최종 악장에는 때때로 1악장의 주요 주제가 재등장하여 영광스러운 리더의 모습으로 전체 작품을 묶어낸다. 이는 주제의 단순한 재활용이 아니라, 고난의 시간을 거친 후 마침내 도달하게 된 영원한 승리이자 종교적 승화를 상징한다.
[틸레만 지휘-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연주, '브루크너 교향곡 제5번']
이처럼 브루크너 음악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꼭 올라가 볼만한 봉우리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더라도 이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브루크너 음악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 거대한 규모와 섬세한 디테일이 감상자에게 물리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온전히 전달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따라서 청취 환경의 질은 브루크너 감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그러면서도 가장 넘기 어려운 문턱이 된다. 브루크너 교향곡을 위한 최상의 환경은 물론 콘서트홀에서의 실연(實演) 감상이다. 실연에서 금관악기가 만들어내는 포르티시모의 소리는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을 넘어 전신을 울리는 물리적인 진동과 압도적인 에너지를 선사한다.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 이 '물리적 카타르시스'는 그의 음악이 요구하는 가장 근원적인 경험이며, 다른 어떤 재생 환경으로도 완전한 대체가 불가능하다. 그의 교향곡은 콘서트홀에서 만들어지는 잔향감과 공간감을 통해 비로소 '소리의 대성당'으로 완성된다. 실제 공간에서 소리가 반사되고 섞이는 입체적인 울림은, 녹음된 소리로는 쉽게 담아낼 수 없는 브루크너 음악 특유의 심오한 숭고미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음악 환경에서 브루크너 교향곡의 실연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서울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연간 대여섯 번을 넘어서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진지한 음악 애호가라면 브루크너 교향곡 실연 감상의 기회가 있을 때 만사를 제쳐놓더라도 최우선적인 스케줄로 고려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태도라 할 수 있다.
사진출처. unsplash
실연 감상이 어렵다면 좀 더 실용적인 대안은 오디오 장치를 통한 음악 감상이다. 녹음된 음악을 접하는 것은 실연 감상에 대한 예습과 복습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문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브루크너 음악이 갖고 있는 극한의 다이내믹 레인지를 실연에 근접한 수준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오디오 장치를 갖추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게다가 고가의 하이엔드 오디오 시스템을 마련하였더라도 아파트 같은 청취 환경에서는 가족이나 아래층 이웃과의 불화를 감내하지 않고서는 온전한 볼륨으로 음악을 듣기 어렵다.
다행히 이러한 비용적 혹은 공간적 제약을 고려한 차선의 대안이 있다. 바로 고성능의 대구경 오버 이어 헤드폰(Over-ear Headphone)이다. 귓속에 넣는 작은 이어폰은 그 편의성과는 별개로 대편성 음악을 듣는 데 근본적 한계가 있다. 하지만 밀폐형으로 만들어진 오버 이어 헤드폰은 무엇보다 외부 소음을 완벽히 차단함으로써 브루크너의 긴 호흡에 대한 집중력과 몰입도를 최고 수준으로 유지하게 해준다. 이는 산만함을 느끼기 쉬운 브루크너 감상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또한 대구경 유닛으로 구현하는 높은 수준의 해상력이 악기별 음색의 레이어와 대위법적 움직임을 귀 가까이에서 정확하게 전달해 준다. 이는 브루크너 음악의 치밀한 구조를 분석적으로 이해하는데 진가를 발휘한다.
보스 QC 울트라 헤드폰. / 사진 출처. KREAM 홈페이지 캡처
따라서 브루크너 음악을 본격적으로 접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조금 번거롭더라도 쓸만한 오버 이어 헤드폰을 하나 장만해 보기를 적극 권한다. 이를 활용하여 브루크너 음악의 구조와 디테일을 익힌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실연 감상을 통해 그 음악의 방대한 구조적 아름다움을 느껴본다면, 그리 머지않은 어느 날 클래식 음악의 마지막 봉우리에 올라서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브루크너 교향곡 전집 명반 7선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하스 판, 노박 판 등 다양한 악보 판본과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그 느낌이 크게 달라지므로, 가급적 다양한 판본과 해석을 들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는 전집 음반 중 해석적 깊이와 영향력이 가장 큰 녹음 7가지를 추천하였다.
1. 오이겐 요훔 (Eugen Jochum) / 베를린 필 &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 1958~1967년 / 브루크너 해석의 고전. 종교적 숭고함과 템포의 유연성이 돋보이는 명반. / 주로 노박(Nowak) 판본
2.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 / 베를린 필하모닉 / 1970~1981년 / 음향적 완벽주의. 베를린 필의 황금기 사운드를 바탕으로 매끄럽고 웅장하며 세련된 해석을 구현. / 주로 하스(Haas) 판본
3. 게오르그 솔티 (Georg Solti) /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 1985~1995년 / 폭발적인 에너지. 시카고 심포니의 강력한 금관을 앞세워 압도적인 박력과 긴장감을 선사하는 '베토벤적 브루크너'. / 주로 노박(Nowak) 판본
4.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Bernard Haitink) /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 1960년대 (舊 전집) / 구조적 명료함과 중용. 감정 과잉 없이 곡의 구조를 명확하게 드러내며 균형 잡힌 해석을 제시. / 주로 노박(Nowak) 판본
5. 크리스티안 틸레만 (Christian Thielemann) / 빈 필하모닉 / 2020s / 빈 필 역사상 최초로 한 지휘자가 녹음한 전곡 녹음. 독일/오스트리아 악파의 장엄함을 계승. / 주로 하스(Haas) 판본
6. 안드리스 넬손스 (Andris Nelsons) /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 2010s / 풍부한 색채감과 세밀한 짜임새를 잘 살린 연주. 전통적인 중후함보다는 인간 브루크너의 고뇌와 신앙심을 조명. / 주로 노바크(Nowak) 판본
7. 귄터 반트 (Günter Wand) / WDR, NDR, 베를린 필하모닉 등 / 1970s~2000s 초 / 논리적 건축미. 명징한 구조 분석과 단호한 템포. 브루크너 음악의 지적인 건축미를 극대화. / 주로 노박(Nowak) 판본
용호성 문화예술평론가·前 문체부 차관 기자 admin@no1reelsite.com
브루크너는 9개의 교향곡과 여러 종교 음악을 남기며 19세기 후기 낭만주의의 거대한 봉우리를 세웠지만, 클래식 음악 감상에서는 가까이하기 힘든 대표적인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수많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노력에도 불구 하고 그의 음악은 여전히 ‘어렵고 지루한 음악’ 혹은 '고수들의 전유물' 같은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격정적인 철학과 광대한 스케일의 음악으로 유명한 말러조차도 이제는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브루크너는 여전히 '접근 불가' 영역에 머물러 있다. 브루크너 음반을 산 기억은 있는데 들은 기억은 없더라도 민망해할 필요 없다. 대부분이 그렇다. 필자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음악사적 비중에도 불구하고 브루크너가 대중적 인지도를 얻지 못하는 이런 현상은 가히 '브루크너 패러독스‘라 불릴만하다.
안톤 브루크너 /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교향곡으로 대표되는 브루크너 의 음악이 지루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음악 자체의 내재적 특성과 청취 환경에 따른 물리적 요인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그의 음악은 기다림의 미학을 강요한다. 말하자면 인내심을 요구하는 불친절한 요소들이 가득한 음악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먼저 만나는 어려움은 긴 연주 시간이다. 그의 교향곡은 한 악장이 보통 20~30분에 달한다. 전곡을 들으려면 8 0~100분의 긴 시간을 할애하여 그야말로 헌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에 느린 전개와 반복성이라는 두 번째 특성이 결합하여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브루크너의 음악은 빠르게 변화하는 드라마틱한 서사를 거부하고, 동기, 리듬, 화성 등의 작은 음악적 모티브를 반복하여 층층이 쌓아가며 에너지와 긴장을 높이는, 이른바 '증가 기법(Steigerung)'에 의존한 다.
증가 기법은 브루크너를 비롯한 후기 낭만주의 음악에서 자주 활용되는 작곡 기법으로서 브루크너 음악의 구조적 특징과 감정적 목표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통용된다. 문제는 긴 시간에 걸쳐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상승을 유도하며 최종적으로 거대한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러한 증가 기법이 성급함을 가진 감상자에게 지루함과 정체감을 유발한다는 점이다. 여기에 더하여 브루크너의 음악은 인간의 고뇌나 사랑 같은 일상적 감정보다는 신에 대한 찬미나 영원의 탐구 같은 초월적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목적의 비일상성은 듣는 사람에게 또 다른 정신적 몰입을 요구한다.
음악 자체의 구조적 특성과 아울러 브루크너 음악은 물리적인 청취 환경 측면에서도 높은 문턱을 갖고 있다. 그의 음악적 미학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직접 듣는 것이다. 그것이 어렵다면 정교한 해상도와 강력한 구동력으로 대편성 음악을 상당한 수준까지 재현하여 음장감을 만들어낼 수 있는 하이엔드 오디오가 대안이 될 수 있다.
사진출처. pixabay
그의 주요 작품 목록을 차지하는 9개의 교향곡은 하나같이 극단적인 다이내믹 레인지를 갖고 있다. 트레몰로 같은 여린 소리(ppp)도 명확하게 들려주어야 하는 동시에 금관악기가 굉음처럼 폭발하는 순간(fff)에도 소리가 찢어지거나 뭉개지지 않고 밀도 높은 에너지를 유지해야 한다. 나아가 브루크너적 웅장함의 기반을 형성하는 저음역대 현악기를 비롯하여 튜바와 트롬본의 묵직한 울림에 대해서도 단순히 양감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각 악기의 질감과 윤곽을 명료하게 살려 전달해야 한다. 게다가 악기들의 공간적 배치와 원근감을 사실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사운드 스테이지의 구현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오디오만이 아니라 스피커의 반사 음향까지 커버할 수 있는 널찍한 공간도 필수적이다. 문제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에게 일반적인 청취 환경이라는 것이 대개는 천정 낮은 아파트에서 듣는 소형 오디오나 이어폰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음향 장치로는 당연히 브루크너의 음악을 제대로 듣기 어렵다. '소리의 대성당(Klang-Kathedrale)'이라는 별칭처럼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대편성의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물리적인 울림과 진동,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층층이 쌓아 올린 복잡한 구조를 느끼는 것이 감상의 핵심 포인트가 된다. 안타깝지만 이를 구현할 수 있는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장대한 스케일의 브루크너 음악은 그저 지루하거나 시끄러운 소음으로 전락하기 쉽다.
이러한 어려움들로 인해 브루크너 듣기는 클래식 음악 감상의 '마지막 봉우리'가 되었다. 그의 음악은 우리에게 현대 사회의 속도와 과시보다는 인내와 겸손을 요구하며 상당한 고행의 과정을 통과한 감상자에게만 모든 것을 쓸어낼 듯한 압도적 카타르시스와 영광의 순간을 선물한다. 물론 브루크너의 작품 중에는 교향곡 외에 소편성 모테트 작품들도 있지만 아무래도 브루크너 음악에 대한 출발점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다. 부담스럽더라도 교향곡을 통해 이 거인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만나볼 필요가 있다. 마음의 준비를 위해 우리가 왜 그의 음악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한 번 살펴보자.
브루크너의 음악은 구조적 완벽성과 종교적 초월성을 결합하여 19세기 후반 유럽 음악계에 독자적인 거대한 건축물을 세웠다. 하지만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음악학자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은 저서 <음악에서의 위대성>에서 브루크너를 “동시대 사람들이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위대한 작곡가”의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하였다. 아인슈타인은 브루크너가 살았던 19세기 후반 빈에서 그의 음악이 환영받지 못했으며, 오히려 에두아르트 한슬릭(Eduard Hanslick)과 같은 영향력 있는 비평가들로부터 혹독한 비난과 조롱을 받았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당시 빈 음악계의 두 진영(보수적인 브람스 진영 vs. 진보적인 바그너 진영) 사이에 벌어진 대립의 구도 속에서 브루크너가 바그너를 열렬히 추종했기 때문에, 그가 브람스 지지자들의 정치적 공격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알프레드 아인슈타인 / 사진. © Georg Fayer, 출처. 위키피디아
당시의 청중과 비평가들은 브루크너의 '새롭고 독창적인 형식'과 '긴 호흡의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브루크너의 음악이 너무 길고, 반복적이며, 혼란스러운 것이라고 치부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진정한 위대성이란 '동시대의 유행과 논쟁'을 넘어선다고 주장하며, 브루크너의 음악이 후대에 와서야 비로소 그 초월적인 구조와 영적인 깊이를 인정받기 시작했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브루크너가 베토벤의 교향곡 정신을 이어받아 오르간적인 웅장함과 깊은 신앙심을 통해 독자적인 '건축적' 음악 세계를 구축했음을 높이 평가하였다. 아인슈타인은 브루크너에 대한 평가의 변화가 "(당대의 인정에 의한) 역사적 위대성"이 반드시 "(후대의 가치 평가에 의한) 예술적 위대성"과 일치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사례라고 말한다. 브루크너는 당대에는 실패했으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 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잠시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1990년 무렵 처음으로 오이겐 요훔의 브루크너 전집을 산 후 딱 한 번 듣고 몇 년간 씨디 랙에서 한 번도 꺼내지 않았었다. 의무감에 사로잡혀 그의 교향곡을 한 번씩 듣는 데도 상당한 고통과 고뇌의 시간이 필요했다. 도대체 이렇게 지루한 음악은 왜 만든 것이고 누가 듣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듣는 내내 가시지 않았다. 그러다가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의 책을 읽고 깊이 반성하며 다시 그의 음반을 꺼내 들었다. 그것이 브루크너와의 진정한 만남의 시작이었다.
브루크너와 동시대의 지휘자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ow)는 브루크너를 가리켜 '절반은 천재, 절반은 바보(half genius, half simpleton)라 평한 바 있다. 이는 그의 뛰어난 음악적 능력과 이에 대조되는 소박한 사회적 성품 사이의 간극을 지적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역설적으로 사회관계에 의지하지 않은 순수한 자아 특성이 그의 음악을 더욱 위대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음악을 애써 찾아 듣는 애호가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비로소 브루크너는 뒤늦게나마 제 몫을 찾아가고 있다.
지휘자 케네스 우즈(Kenneth Woods)는 브루크너 음악이 개인적인 드라마가 아닌 우주의 질서와 신의 영광을 담고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나르시시즘으로부터 감정을 해방”한다고 표현한 바 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오르간 연주자로서의 경험과 독실한 신앙심이 낳은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음악학자 데릭 쿡(Deryck Cooke)은 브루크너 교향곡이 "베토벤과 바그너에게 일반적인 빚을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형식적 과정의 절대적 독창성“을 갖고 있다고 평했다.
이는 그의 음악이 단순한 후기 낭만주의가 아니라, 그 자체로 고유한 하나의 장르를 형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브루크너에게 비판적이었던 브람스 진영의 비평가 막스 칼베크(Max Kalbeck)조차도 그의 음악을 "세속적인 논리, 예술, 상식이라는 불경한 첨가물 없이, 위나 아래로부터 받은 순수한 계시의 음악"이라 묘사했다. 브루크너에게 음악은 지적 유희가 아니라, 신과의 소통이자 영원성을 탐구하는 수단이었으며, 이는 교향곡에서 종교음악의 걸작 <테 데움 Te Deum>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 전반에 일관되게 흐르는 정서이다.
브루크너 교향곡의 위대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건축적' 구조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의 음악은 블록과 같은 모듈러 형태의 구조를 갖고 있다. 그의 교향곡은 베토벤처럼 주제를 유기적으로 발전시키기보다는, 거대한 음악적 블록이나 악기군의 색채 대비를 통해 독립된 구조를 형성한다. 그래서 마치 오르간의 레지스터를 바꾸듯, 금관이나 현악기 같은 특정 악기군이 교대로 등장하며 장대한 벽돌을 쌓아 올리는 느낌을 준다. 앞서 증가 기법에서도 간략히 이야기한 것처럼 브루크너의 음악은 여린 현악기 피아니시모의 트레몰로에서 출발하여, 리듬과 화성을 단계적으로 층층이 쌓아 올린다. 이러한 '고조(Steigerung)' 과정은 인내를 요구하지만, 그 과정에서 거대한 파도가 서서히 밀려오듯 막대한 에너지를 축적해 간다. 그리하여 악장의 거의 끝부분에 위치한 클라이막스에 이르러서는 최고조의 긴장감 뒤에 금관악기가 폭발하는 영광스러운 포르티시모의 해방감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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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니스트였던 브루크너는 관현악을 마치 하나의 거대한 오르간처럼 다루었다. 특히 트롬본과 튜바는 그의 교향곡에서 단순한 악기를 넘어 종교적 권위와 숭고함을 상징한다. 이들이 들려주는 웅장한 화성은 브루크너 음악의 백미이자, 그가 추구한 신성한 울림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교향곡이 갖고 있는 순환 구조와 '귀환(Return)'의 미학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5번 교향곡을 비롯하여 4번, 8번 등 여러 작품의 최종 악장에는 때때로 1악장의 주요 주제가 재등장하여 영광스러운 리더의 모습으로 전체 작품을 묶어낸다. 이는 주제의 단순한 재활용이 아니라, 고난의 시간을 거친 후 마침내 도달하게 된 영원한 승리이자 종교적 승화를 상징한다.
[틸레만 지휘-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연주, '브루크너 교향곡 제5번']
이처럼 브루크너 음악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꼭 올라가 볼만한 봉우리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더라도 이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브루크너 음악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 거대한 규모와 섬세한 디테일이 감상자에게 물리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온전히 전달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따라서 청취 환경의 질은 브루크너 감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그러면서도 가장 넘기 어려운 문턱이 된다. 브루크너 교향곡을 위한 최상의 환경은 물론 콘서트홀에서의 실연(實演) 감상이다. 실연에서 금관악기가 만들어내는 포르티시모의 소리는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을 넘어 전신을 울리는 물리적인 진동과 압도적인 에너지를 선사한다.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 이 '물리적 카타르시스'는 그의 음악이 요구하는 가장 근원적인 경험이며, 다른 어떤 재생 환경으로도 완전한 대체가 불가능하다. 그의 교향곡은 콘서트홀에서 만들어지는 잔향감과 공간감을 통해 비로소 '소리의 대성당'으로 완성된다. 실제 공간에서 소리가 반사되고 섞이는 입체적인 울림은, 녹음된 소리로는 쉽게 담아낼 수 없는 브루크너 음악 특유의 심오한 숭고미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음악 환경에서 브루크너 교향곡의 실연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서울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연간 대여섯 번을 넘어서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진지한 음악 애호가라면 브루크너 교향곡 실연 감상의 기회가 있을 때 만사를 제쳐놓더라도 최우선적인 스케줄로 고려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태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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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 감상이 어렵다면 좀 더 실용적인 대안은 오디오 장치를 통한 음악 감상이다. 녹음된 음악을 접하는 것은 실연 감상에 대한 예습과 복습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문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브루크너 음악이 갖고 있는 극한의 다이내믹 레인지를 실연에 근접한 수준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오디오 장치를 갖추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게다가 고가의 하이엔드 오디오 시스템을 마련하였더라도 아파트 같은 청취 환경에서는 가족이나 아래층 이웃과의 불화를 감내하지 않고서는 온전한 볼륨으로 음악을 듣기 어렵다.
다행히 이러한 비용적 혹은 공간적 제약을 고려한 차선의 대안이 있다. 바로 고성능의 대구경 오버 이어 헤드폰(Over-ear Headphone)이다. 귓속에 넣는 작은 이어폰은 그 편의성과는 별개로 대편성 음악을 듣는 데 근본적 한계가 있다. 하지만 밀폐형으로 만들어진 오버 이어 헤드폰은 무엇보다 외부 소음을 완벽히 차단함으로써 브루크너의 긴 호흡에 대한 집중력과 몰입도를 최고 수준으로 유지하게 해준다. 이는 산만함을 느끼기 쉬운 브루크너 감상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또한 대구경 유닛으로 구현하는 높은 수준의 해상력이 악기별 음색의 레이어와 대위법적 움직임을 귀 가까이에서 정확하게 전달해 준다. 이는 브루크너 음악의 치밀한 구조를 분석적으로 이해하는데 진가를 발휘한다.
보스 QC 울트라 헤드폰. / 사진 출처. KREAM 홈페이지 캡처
따라서 브루크너 음악을 본격적으로 접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조금 번거롭더라도 쓸만한 오버 이어 헤드폰을 하나 장만해 보기를 적극 권한다. 이를 활용하여 브루크너 음악의 구조와 디테일을 익힌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실연 감상을 통해 그 음악의 방대한 구조적 아름다움을 느껴본다면, 그리 머지않은 어느 날 클래식 음악의 마지막 봉우리에 올라서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브루크너 교향곡 전집 명반 7선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하스 판, 노박 판 등 다양한 악보 판본과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그 느낌이 크게 달라지므로, 가급적 다양한 판본과 해석을 들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는 전집 음반 중 해석적 깊이와 영향력이 가장 큰 녹음 7가지를 추천하였다.
1. 오이겐 요훔 (Eugen Jochum) / 베를린 필 &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 1958~1967년 / 브루크너 해석의 고전. 종교적 숭고함과 템포의 유연성이 돋보이는 명반. / 주로 노박(Nowak) 판본
2.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 / 베를린 필하모닉 / 1970~1981년 / 음향적 완벽주의. 베를린 필의 황금기 사운드를 바탕으로 매끄럽고 웅장하며 세련된 해석을 구현. / 주로 하스(Haas) 판본
3. 게오르그 솔티 (Georg Solti) /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 1985~1995년 / 폭발적인 에너지. 시카고 심포니의 강력한 금관을 앞세워 압도적인 박력과 긴장감을 선사하는 '베토벤적 브루크너'. / 주로 노박(Nowak) 판본
4.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Bernard Haitink) /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 1960년대 (舊 전집) / 구조적 명료함과 중용. 감정 과잉 없이 곡의 구조를 명확하게 드러내며 균형 잡힌 해석을 제시. / 주로 노박(Nowak) 판본
5. 크리스티안 틸레만 (Christian Thielemann) / 빈 필하모닉 / 2020s / 빈 필 역사상 최초로 한 지휘자가 녹음한 전곡 녹음. 독일/오스트리아 악파의 장엄함을 계승. / 주로 하스(Haas) 판본
6. 안드리스 넬손스 (Andris Nelsons) /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 2010s / 풍부한 색채감과 세밀한 짜임새를 잘 살린 연주. 전통적인 중후함보다는 인간 브루크너의 고뇌와 신앙심을 조명. / 주로 노바크(Nowak) 판본
7. 귄터 반트 (Günter Wand) / WDR, NDR, 베를린 필하모닉 등 / 1970s~2000s 초 / 논리적 건축미. 명징한 구조 분석과 단호한 템포. 브루크너 음악의 지적인 건축미를 극대화. / 주로 노박(Nowak) 판본
용호성 문화예술평론가·前 문체부 차관 기자 admin@no1reelsi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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