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행복을 선물하세요Vimax로 자신감 넘치는 남자로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가주랑남 작성일25-11-26 07:53 조회71회 댓글0건관련링크
-
http://20.cia312.com
62회 연결
-
http://28.cia948.com
65회 연결
본문
바로가기 go !! 바로가기 go !!
그녀에게 더 큰 행복을 선물하세요
Vimax로 자신감 넘치는 남자로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더 큰 자신감을 갖고 싶다면?
많은 남성들이 사랑하는 여성을 위해 더 나은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합니다.더 좋은 옷을 입고, 더 건강한 몸을 만들고, 더 매력적인 남자가 되고 싶죠.하지만, 남성들이 쉽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한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크기가 만족스럽지 않다면?사랑하는 그녀에게 최고의 경험을 선사하고 싶다면?
이러한 고민은 남성들의 자존감과 만족감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하지만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Vimax비맥스가 당신의 고민을 해결해 줄 것입니다.
비맥스Vimax란?
비맥스Vimax는 천연 성분으로 만들어진 남성 성기 확대 및 성기능 강화 보조제입니다.
오랜 연구 끝에 탄생한 과학적 성분 배합
혈류 개선, 조직 확장, 성기능 강화까지 한 번에
비수술적, 안전한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변화
비맥스는 단순한 보조제가 아닙니다.남성의 자신감과 만족도를 극대화하여, 더욱 강력한 남자로 거듭나게 합니다.
비맥스, 어떻게 효과를 발휘할까?
비맥스의 핵심 원리는 혈류 증가와 조직 성장 촉진입니다.남성 성기는 해면체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혈액이 유입되면서 팽창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1. 혈류 개선강한 발기력과 지속력
비맥스는 혈관을 확장시켜 혈류량을 증가시킵니다.
더 강한 발기력
지속적인 성기능 향상
2. 해면체 조직 확장자연스러운 크기 증가
비맥스의 성분은 성기의 해면체 조직을 확장시켜 더 많은 혈액을 저장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점진적인 크기 증가
자연스러운 확대 효과
3. 남성 호르몬 균형 조절성욕과 체력 증진
비맥스는 남성 호르몬 분비를 활성화하여 더 강한 성욕과 체력을 제공합니다.
전반적인 남성 활력 증가
성관계 만족도 향상
비맥스의 핵심 성분과 효과
비맥스는 천연 허브와 비타민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어 안전하면서도 효과적인 성능을 발휘합니다.
호손 베리 Hawthorn Berry 혈류 개선 amp 심장 건강 증진
진센 Ginseng 남성 호르몬 활성화 amp 성욕 증진
팔메토 Saw Palmetto 전립선 건강 amp 성기능 강화
잉카마카 Maca Root 정력 증진 amp 체력 강화
카투아바 Catuaba Bark 신경 안정 amp 발기력 개선
이처럼, 비맥스는 과학적으로 검증된 성분들로 이루어져 있어 부작용 없이 지속적인 효과를 제공합니다.
비맥스가 필요한 순간
1. 사랑하는 그녀를 더욱 만족시키고 싶을 때
성관계에서 더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싶다면
그녀에게 더 깊은 쾌감을 선사하고 싶다면
2. 남성으로서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싶을 때
성기 크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면
남성으로서 더 당당하고 싶다면
3. 나이가 들면서 성기능이 저하되었을 때
젊을 때의 강한 발기력을 되찾고 싶다면
성관계 지속 시간이 짧아지는 것이 걱정된다면
비맥스는 단순히 성기 크기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남성으로서의 자존감과 만족도를 극대화하는 제품입니다.
비맥스를 통한 변화실제 사용자 경험
김민수39세, 직장인
아내와의 관계가 점점 소홀해지고 있었어요. 크기 때문에 자신감도 없었죠.비맥스를 꾸준히 복용하면서 확실히 변화를 느끼고 있습니다.아내도 예전보다 만족도가 높아졌다고 하고, 저도 자신감이 생겼어요
박재훈45세, 사업가
젊었을 때와 달리 발기력도 떨어지고, 관계도 짧아졌어요.운동도 해보고 식습관도 바꿔봤지만 큰 효과가 없었죠.비맥스를 3개월 정도 복용했는데, 확실히 성기능이 좋아지고 크기도 커진 느낌이에요
실제 사용자들의 경험이 말해주듯, 비맥스는 단순한 보조제가 아니라 남성의 삶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솔루션입니다.
비맥스, 효과적으로 복용하는 방법
하루 1~2정을 꾸준히 복용
최소 3개월 이상 지속적으로 사용해야 효과 극대화
규칙적인 운동과 건강한 식습관을 병행하면 더욱 강력한 효과
비맥스는 꾸준한 사용이 중요합니다.단기간에 극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보다는, 장기적인 효과를 목표로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녀에게 더 큰 행복을 주고 싶다면?
더 강한 남성으로 거듭나고 싶다면
사랑하는 그녀를 더욱 만족시키고 싶다면
자신감 넘치는 삶을 원한다면
Vimax비맥스를 지금 선택하세요. 더 강하고, 더 크고, 더 자신감 넘치는 남자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더 강한 남자가 될 때, 그녀도 더 행복해집니다. 비맥스와 함께, 새로운 당신을 만나보세요
술 먹고 팔팔정 디시 후기를 보면 음주 후 복용에 대한 궁금증과 경험담이 많습니다. 음주와 함께 복용 시 효과가 떨어질 수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합니다. 슈퍼비닉스100mg 가격은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가성비를 고려하는 분들에게 인기가 있습니다. 다만, 슈퍼비닉스 음주 병용은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복용 전 반드시 사용법을 확인하세요. 하나약국에서 건강한 선택으로 효과를 극대화하세요
기자 admin@gamemong.info
서울 서초구 반포동 스페이스21에서 1970년대 전위미술을 후원했던 명동화랑을 조명하는 ‘응답하라! 명동화랑’전이 지난 19일 개막했다. 강국진, 김창열, 김태호, 성능경, 박서보, 이건용, 이우환, 윤형근, 하인두 등 명동화랑에서 개인전과 기획전을 열었던 작가 13명의 작품이 전시됐다. 사진은 당시 전시 포스터와 관련 자료들. 스페이스21 제공
1975년 여름, 서울 미술계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임대료를 내지 못해 그해 1월 문을 닫은 한 화랑을 살리자는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명 야마토게임 동화랑 재기의 몸부림/ 집세 밀려 소장품마저 압수…간판 내려/ 화단 일각서 ‘돕기 운동’ 활발히”
명동화랑 창업주 김문호.
그해 6월 10일자 경향신문에 나온 기사의 제목만 봐도 짠해지는 주인공은 갤러리 운영으로 집 바다이야기오락실 두 채를 날리고 빈털터리가 됐다는 명동화랑 창업주 김문호(1930∼1982)다. 도대체 어떤 좋은 일을 했기에 화가와 조각가들이 발 벗고 나서 다시 갤러리를 열어달라며 기금 마련 전시회까지 가졌을까.
1970년 12월 명동성당 건너편 건설회관 2층에 문을 연 명동화랑은 개관 초부터 화제였다. 75평 면적에 전등만 100개가 넘는 이례적인 온라인골드몽 규모였다. 그해 4월 인사동에 반도화랑 직원 출신의 박명자씨가 문을 연 현대화랑(현 갤러리현대)이 12평짜리였으니까 화가들이 놀랄만했다. 현대화랑은 지금까지 살아남아 ‘본격적인 국내 첫 상업 갤러리’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하지만 김문호의 명동화랑은 잦은 이사와 함께 점점 규모가 작아졌고, 마침내 그가 세상을 떠나며 10여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오징어릴게임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명동화랑을 기억하는 것은 그 전위성 때문이다. 서울옥션 이호재 회장은 23일 “운보 김기창, 이당 김은호의 동양화, 도상봉의 유화 정물화가 잘 팔리던 시절에 전위적인 작품만 취급했다”며 “현대미술을 하는 화랑의 시조는 김문호의 명동화랑”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명동화랑은 장사를 못한 게 아니라 안 될 작가를 한 손오공게임 것”이라고 부연했다.
김문호는 만 40세에 화랑업이 “유망해보여” 뛰어들었다고 한다. 부친의 석유회사에서 근무하다 명화 복제화 수출업을 시작하며 미술과 인연을 맺게 됐다. 한국은 1970년 무렵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과가 나며 경제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 덕에 전후 처음으로 미술 시장이 형성되던 때였다. 하지만 작품이 팔려도 대중적 미감의 동양화와 구상 회화 중심이었다. 박명자의 현대화랑이 ‘김기창 도상봉 장우성 같은 주요 작가 전시로 완판에 가까운 실적”(경향신문 1971년 4월 8일)을 낸 것이 그러한 상황을 보여준다.
김문호는 대중적 취향이 아니었다. 71년에 가진 두 번째 기획전 ‘회화 오늘의 한국전: 30대의 얼굴들’이 그 신호였다. 회화도 조각도 아닌 새로운 미술 실험을 하던 AG(아방가르드의 이니셜), ST(스페이스 &타임의 영어 이니셜), 오리진 등 여러 미술그룹에서 활동하던 당시 30대 청년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했다. 생존 작가 중 작품 가격이 가장 비싼 이우환의 한국 첫 개인전을 열어준 곳도 명동화랑이었다. 지금은 한국 미술계의 간판 장르가 된 단색화(단색 계열의 추상화) 대표 작가 박서보, 윤형근, 김창열, 하종현의 개인전이 열렸다. 단색화가 첫 뿌리를 내린 거점이 명동화랑이었다.
‘실험미술 대가’로 평가받는 이강소 작가가 30세이던 1973년 명동화랑 개인전에서 선보인 ‘소멸’(선술집) 퍼포먼스. 스페이스21 제공
단색화뿐 아니었다. 단색화 뒤를 이은 실험미술 대가 이강소는 개인전을, 성능경, 이건용 등은 그룹전에 참여했다. 이강소는 김문호 대표가 개인전에 초대하며 “마음대로 하라”는 말에 고무돼 화랑에 선술집을 차리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당시는 이벤트로 불림)를 했다. 비운의 조각가 권진규에게 전속작가처럼 작품 제작을 후원하고 1971년 개인전을 열어준 곳도 명동화랑이었다.
명동화랑이 1974년 창간한 미술비평지 '현대미술' 표지.
단색화 작가들과 실험미술 작가들은 지금 원로가 돼 미술계 거장이 됐지만 당시는 30대의 신진 작가에 지나지 않았다. 전시를 해도 작품이 팔리지 않는 추상화나 개념미술 장르의 작가들이었다. 1973년 대규모 기획전 ‘한국현대미술 1957-72, 추상=상황/조형과 반조형’은 1957년을 현대미술의 기점으로 삼아 15년간의 흐름을 정리한 것인데, 국립현대미술관이 1978년에 가서야 한국현대미술 20년의 동향전을 개최한 것보다 5년 앞섰다. 비평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1974년 ‘현대미술’ 잡지를 창간했다. 야심과는 달리 재정난으로 창간호만 내고 폐간됐지만 말이다.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공간화랑’을 운영하며 수시로 서울 화랑가를 오갔던 신옥진씨는 “당시는 명동화랑에서 전시를 열어준다고 하면 단색화 청년 작가들이 신도 안 신고 달려올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김문호가 미술시장 형성 초기인 1970년대에 끼친 영향에 대해 “희한한 사람이 나타난 거”라고 표현했다.
김문호는 “단순히 중개자가 아니라, 미술사에 남을 훌륭한 작품을 그 현장에서 증인으로 지켜보는 창조적 화상”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화가들이 나아갈 길을 터주고 대중에게 제시하는 화상”을 꿈꿨다. 그래서 전문가의 안목을 빌릴 줄도 알았다. 홍익대 교수인 미술평론가 유준상, 이일 등과 교유하며 이들에게 기획과 평론을 의뢰했다. 국립현대미술관장 출신의 미술평론가 오광수씨는 젊은 작가들과 비평가들이 오가며 왁자지껄했던 그 시절 명동화랑을 “마치 화상 컨바일러와 피카소 및 큐비즘 화가들이 벌였던 20세기 초두의 전설적인 화상과 화가들의 시절을 방불케 했다”고 평했다.
하지만 돈 앞에 장사는 없다. 점점 재정이 엉망이 되면서 그는 1년이 멀다하고 갤러리를 옮겨야 했다. 처음 명동에서 충무로로, 다시 안국동으로 이사한 72년 8월부터 75년 1월까지 안국동 시절이 명동화랑의 전성기였다. 그 안국동의 명동화랑이 간판을 내리게 되면서 당대 작가들이 팔을 걷고 나섰고, 덕분에 76년 2월 관훈동에 재개관 기념전까지 열 수 있게 됐다.
“화상이 망했을 때 화가들이 도와주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고마운 일이다. 미술계 발전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
이런 다짐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한번 더 관훈동의 다른 장소로 옮겨야 했다. 관훈미술관 사장이 내준 자투리 공간에 더부살이하다시피 했다. 마지막에는 갤러리 월급 사장으로 지내다 암 투병 끝에 50대 초반에 세상을 등졌다.
명동화랑도, 김문호도 단명했지만 미술계는 그를 역사로 기억하고 있다. 명동화랑을 조명하는 전시 ‘응답하라! 명동화랑’이 서울 서초구 신생 갤러리 스페이스21에서 열리고 있다. 김문호와 활발히 교유하며 명동화랑전시에 평문을 자주 써준 미술평론가 이일의 딸 이유진씨가 대표로 있는 화랑이다. 전시에는 이우환, 박서보, 윤형근, 이건용, 김구림, 성능경 등 당시 명동화랑에서 연 개인전과 그룹전 등에 참여한 13명 작가들의 작품을 일부 선별해 선보이고 있다. 전시를 기획한 홍익대 정연심 교수는 “작가들이 예술정책을 통해 지원되는 오늘날과 달리, 1970년대에는 이런 제도적 지원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작가들의 개인적인 고군분투와 서울의 명동화랑과 같은 전시공간의 역할이 지대했다”며 “명동화랑의 실험성과 전위성을 되새기며 한국 미술에서 소거된 내러티브를 되살려 보는 것이 전시 취지”라고 밝혔다.
같은 해 문을 연 뒤 여전히 살아남아 창립 55년째를 맞는 현대화랑 창업자 박명자 회장은 “김문호 대표는 꿈이 크셨는데 (대중보다) 너무 앞서 갔다. 10년, 20년 앞서 갔다”고 기억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가 살아남지 못했지만 그 그늘 아래 있었던 이들이 지금 명동화랑을 불러내고 있다. 그 전시에 초대한다. 12월 27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1975년 여름, 서울 미술계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임대료를 내지 못해 그해 1월 문을 닫은 한 화랑을 살리자는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명 야마토게임 동화랑 재기의 몸부림/ 집세 밀려 소장품마저 압수…간판 내려/ 화단 일각서 ‘돕기 운동’ 활발히”
명동화랑 창업주 김문호.
그해 6월 10일자 경향신문에 나온 기사의 제목만 봐도 짠해지는 주인공은 갤러리 운영으로 집 바다이야기오락실 두 채를 날리고 빈털터리가 됐다는 명동화랑 창업주 김문호(1930∼1982)다. 도대체 어떤 좋은 일을 했기에 화가와 조각가들이 발 벗고 나서 다시 갤러리를 열어달라며 기금 마련 전시회까지 가졌을까.
1970년 12월 명동성당 건너편 건설회관 2층에 문을 연 명동화랑은 개관 초부터 화제였다. 75평 면적에 전등만 100개가 넘는 이례적인 온라인골드몽 규모였다. 그해 4월 인사동에 반도화랑 직원 출신의 박명자씨가 문을 연 현대화랑(현 갤러리현대)이 12평짜리였으니까 화가들이 놀랄만했다. 현대화랑은 지금까지 살아남아 ‘본격적인 국내 첫 상업 갤러리’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하지만 김문호의 명동화랑은 잦은 이사와 함께 점점 규모가 작아졌고, 마침내 그가 세상을 떠나며 10여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오징어릴게임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명동화랑을 기억하는 것은 그 전위성 때문이다. 서울옥션 이호재 회장은 23일 “운보 김기창, 이당 김은호의 동양화, 도상봉의 유화 정물화가 잘 팔리던 시절에 전위적인 작품만 취급했다”며 “현대미술을 하는 화랑의 시조는 김문호의 명동화랑”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명동화랑은 장사를 못한 게 아니라 안 될 작가를 한 손오공게임 것”이라고 부연했다.
김문호는 만 40세에 화랑업이 “유망해보여” 뛰어들었다고 한다. 부친의 석유회사에서 근무하다 명화 복제화 수출업을 시작하며 미술과 인연을 맺게 됐다. 한국은 1970년 무렵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과가 나며 경제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 덕에 전후 처음으로 미술 시장이 형성되던 때였다. 하지만 작품이 팔려도 대중적 미감의 동양화와 구상 회화 중심이었다. 박명자의 현대화랑이 ‘김기창 도상봉 장우성 같은 주요 작가 전시로 완판에 가까운 실적”(경향신문 1971년 4월 8일)을 낸 것이 그러한 상황을 보여준다.
김문호는 대중적 취향이 아니었다. 71년에 가진 두 번째 기획전 ‘회화 오늘의 한국전: 30대의 얼굴들’이 그 신호였다. 회화도 조각도 아닌 새로운 미술 실험을 하던 AG(아방가르드의 이니셜), ST(스페이스 &타임의 영어 이니셜), 오리진 등 여러 미술그룹에서 활동하던 당시 30대 청년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했다. 생존 작가 중 작품 가격이 가장 비싼 이우환의 한국 첫 개인전을 열어준 곳도 명동화랑이었다. 지금은 한국 미술계의 간판 장르가 된 단색화(단색 계열의 추상화) 대표 작가 박서보, 윤형근, 김창열, 하종현의 개인전이 열렸다. 단색화가 첫 뿌리를 내린 거점이 명동화랑이었다.
‘실험미술 대가’로 평가받는 이강소 작가가 30세이던 1973년 명동화랑 개인전에서 선보인 ‘소멸’(선술집) 퍼포먼스. 스페이스21 제공
단색화뿐 아니었다. 단색화 뒤를 이은 실험미술 대가 이강소는 개인전을, 성능경, 이건용 등은 그룹전에 참여했다. 이강소는 김문호 대표가 개인전에 초대하며 “마음대로 하라”는 말에 고무돼 화랑에 선술집을 차리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당시는 이벤트로 불림)를 했다. 비운의 조각가 권진규에게 전속작가처럼 작품 제작을 후원하고 1971년 개인전을 열어준 곳도 명동화랑이었다.
명동화랑이 1974년 창간한 미술비평지 '현대미술' 표지.
단색화 작가들과 실험미술 작가들은 지금 원로가 돼 미술계 거장이 됐지만 당시는 30대의 신진 작가에 지나지 않았다. 전시를 해도 작품이 팔리지 않는 추상화나 개념미술 장르의 작가들이었다. 1973년 대규모 기획전 ‘한국현대미술 1957-72, 추상=상황/조형과 반조형’은 1957년을 현대미술의 기점으로 삼아 15년간의 흐름을 정리한 것인데, 국립현대미술관이 1978년에 가서야 한국현대미술 20년의 동향전을 개최한 것보다 5년 앞섰다. 비평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1974년 ‘현대미술’ 잡지를 창간했다. 야심과는 달리 재정난으로 창간호만 내고 폐간됐지만 말이다.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공간화랑’을 운영하며 수시로 서울 화랑가를 오갔던 신옥진씨는 “당시는 명동화랑에서 전시를 열어준다고 하면 단색화 청년 작가들이 신도 안 신고 달려올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김문호가 미술시장 형성 초기인 1970년대에 끼친 영향에 대해 “희한한 사람이 나타난 거”라고 표현했다.
김문호는 “단순히 중개자가 아니라, 미술사에 남을 훌륭한 작품을 그 현장에서 증인으로 지켜보는 창조적 화상”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화가들이 나아갈 길을 터주고 대중에게 제시하는 화상”을 꿈꿨다. 그래서 전문가의 안목을 빌릴 줄도 알았다. 홍익대 교수인 미술평론가 유준상, 이일 등과 교유하며 이들에게 기획과 평론을 의뢰했다. 국립현대미술관장 출신의 미술평론가 오광수씨는 젊은 작가들과 비평가들이 오가며 왁자지껄했던 그 시절 명동화랑을 “마치 화상 컨바일러와 피카소 및 큐비즘 화가들이 벌였던 20세기 초두의 전설적인 화상과 화가들의 시절을 방불케 했다”고 평했다.
하지만 돈 앞에 장사는 없다. 점점 재정이 엉망이 되면서 그는 1년이 멀다하고 갤러리를 옮겨야 했다. 처음 명동에서 충무로로, 다시 안국동으로 이사한 72년 8월부터 75년 1월까지 안국동 시절이 명동화랑의 전성기였다. 그 안국동의 명동화랑이 간판을 내리게 되면서 당대 작가들이 팔을 걷고 나섰고, 덕분에 76년 2월 관훈동에 재개관 기념전까지 열 수 있게 됐다.
“화상이 망했을 때 화가들이 도와주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고마운 일이다. 미술계 발전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
이런 다짐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한번 더 관훈동의 다른 장소로 옮겨야 했다. 관훈미술관 사장이 내준 자투리 공간에 더부살이하다시피 했다. 마지막에는 갤러리 월급 사장으로 지내다 암 투병 끝에 50대 초반에 세상을 등졌다.
명동화랑도, 김문호도 단명했지만 미술계는 그를 역사로 기억하고 있다. 명동화랑을 조명하는 전시 ‘응답하라! 명동화랑’이 서울 서초구 신생 갤러리 스페이스21에서 열리고 있다. 김문호와 활발히 교유하며 명동화랑전시에 평문을 자주 써준 미술평론가 이일의 딸 이유진씨가 대표로 있는 화랑이다. 전시에는 이우환, 박서보, 윤형근, 이건용, 김구림, 성능경 등 당시 명동화랑에서 연 개인전과 그룹전 등에 참여한 13명 작가들의 작품을 일부 선별해 선보이고 있다. 전시를 기획한 홍익대 정연심 교수는 “작가들이 예술정책을 통해 지원되는 오늘날과 달리, 1970년대에는 이런 제도적 지원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작가들의 개인적인 고군분투와 서울의 명동화랑과 같은 전시공간의 역할이 지대했다”며 “명동화랑의 실험성과 전위성을 되새기며 한국 미술에서 소거된 내러티브를 되살려 보는 것이 전시 취지”라고 밝혔다.
같은 해 문을 연 뒤 여전히 살아남아 창립 55년째를 맞는 현대화랑 창업자 박명자 회장은 “김문호 대표는 꿈이 크셨는데 (대중보다) 너무 앞서 갔다. 10년, 20년 앞서 갔다”고 기억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가 살아남지 못했지만 그 그늘 아래 있었던 이들이 지금 명동화랑을 불러내고 있다. 그 전시에 초대한다. 12월 27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